- 독서보고
교재 및 참고도서 중 3권을 읽고 각 권 당 2매씩 제출.
내용요약과 깨달은 점, 사역에 적용 점 등 두 페이지로..
시험보기 두 주 전에 제출
- 발제
현대선교의 핵심주제 8가지
세계 선교역사 100주제에 대한 발표
3명이 한 조, 한 조에서 세 주제를 발제,
한 주 전에
다음카페 “영신선교”에 세 개 조가 업로드를 하고 업로드하면 각 사람은 리플을 달 것.
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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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글에 각주를 달되
1)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는 반드시 따옴표(“ ”)를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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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책의 경우
저자 이름, 『책 제목』「잡지」(출판지: 출판사, 년도), 페이지번호.
예)
- 번역서의 경우
저자 이름, 영어 책 이름, 번역자 이름, 번역된 책 이름, -----------
- 앞에서 인용된 책을 다시 인용할 때
저자 이름, 책 이름, 페이지
- 논문의 경우
저자 이름, “논문이름”, 「책 이름」, 년도, 페이지
예) 안승오, “에큐메니칼 기독사상”, 「신학과 목회」제28집, 1998, 24
엣세네파와 예수파
엣세네- 강력한 종말론, 뜨거운 신앙,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사라짐
예수- 세계적 종교
세계적 종교가 된 이유는 마28:20(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만해도 기독교는 유럽에만 있었다.
200년 전만해도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위대한 19세기.. 선교사들이 나가며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진다.
기독교가 제자삼음이라는 사명을 하지 않을 경우 500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한국교회도 위기...
제자삼음이 이루어 질 때 교회라는 것이 생긴다.
교회에서 세례, 교육이 일어난다.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은 제자삼음이 사라진다는 것이고 새로운 제자삼음도 없다. 교회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에는 세상에서 구원이 일어난다고 본다. 교회는 세상에서 구원이 일어나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다.
옛날에는 세상에는 구원이 없다. 구원을 받으려면 교회로 와야 한다. 지금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직접 구원을 이룬다. 교회에서 사람을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한다.
교회의 위상이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중요하다.
교회 성장이라는 것이 부작용을 일으킨다. 대형교회, 수평이동..
이런 성장말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제자삼음.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대신학의 관심이 제자삼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생명살림, 종교간의 대화 등에 관심이 많다.
안승오교수는 여기에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신학적인 패러다임을 가지고 어떠한 현장으로 들어갈 건지 고민해보라.
바르트는 신학이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책이 “교회교의학”..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다. 칼바르트의 말과 연관해서 안승오교수는 교회가 없는 신학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한 학기 동안 어떻게 교회를 세울 것인가의 고민을 하자.
[3월 18일]
수업이 잘 진행되기 위해 협조를 해달라.
결석하지 말라. 이 수업에 최우선을 다해 달라. 지각도 하지 말라.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ㅋㅋ
다른 사람에게 수업에 방해될만한 일은 하지 말라.
질문은 모르는 것만 하라.
발제하는 법은 카페에 올려 두었으니 참고하여 좋은 발제를 하라.
선교신학의 기본적인 것에 대해 말한다.
1. 선교와 교회
전통적으로 선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성경구절 마28:18-20 말씀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1) 모든 민족(족속)-> 제자삼음
어떤 학자는 24000족속이 있다고 하나 154 대략 16000개 족속이 있다.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종족은 6430개가 있다고 한다.
미전도종족은 어떻게 구별하느냐?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2%미만인 경우 미전도 종족. 전체 기독교인이 5%미만인 경우 미전도 종족이다.
우리가 전세계를 다 복음화 시킬 수는 없지만 16000개 전종족에 5%에 그리스도인이 있도록 만드는 것이 선교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
2) 세례
3)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려면 교회가 있어야 한다. 동사무소는 이 일을 못 한다. 이 세상에 유일한 기관이 교회다. 선교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하다.
선교는 교회를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선교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세워졌냐 안 세워졌냐? 아무리 선교를 많이 했다고 해도 교회가 세워지지 않으면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교회가 선교의 바로미터
교회는 선교를 생각해야 한다. 아직도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을 복음화해야겠다. 선교와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지향하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회의 부흥은 담임목사가 그랜져타고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를 하니까 교회를 세우니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성장은 수평이동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불신자를 데려오는 전도에 의한 부흥을 말한다.
그래서 선교학은 교회성장학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교회성장은 건강한 교회성장을 말한다.
그렇다면 신학이라는 것은 어디쯤 있는가? 칼바르트가 말하기를 “신학은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라고 했다. 당연히 신학은 선교적인 열정을 지닌 학문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이 되면 곤란하고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칼바르트가 지은 책이름이 “교회교의학”이다. 신학의 목적은 교회를 얼마나 잘 섬길 수 있는가?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가?에 있다.
그런데, 이 중요한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2. 교회의 약화현상
대체적으로 교회가 약화되고 있음이 두드러지고 있다. 영국에서 교회가 이슬람에 팔려가고 술집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몰라요 어떻게 될지.. 30년, 50년, 100년이 지나서 어떻게 될런지..
이슬람이 선교를 왕성하게 펼치고자 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이슬람은 대한민국을 이슬람화시키면 전세계가 이슬람화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슬람은 한 번 이슬람이 되면 영원한 이슬람이 된다. 지금까지 이슬람이 된 지역은 기독교화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가 된 지역은 이슬람화 되고 있다. 과거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요충지들이 이슬람화되고 있다. 비디오에 본 것 같이 버밍햄같은 도시가 머지않아 이슬람화 될 가능성이 많다.
첫째, 이슬람은 집단적 신앙인데 비해서 기독교는 개인적 신앙이 강하다.
개인적 신앙은 개인에게 맡겨두는 형태인데 신앙이라는 것은 1대 2대 3대로 내려가면서 점차로 약해지는 특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복음이 들어온지 5대쯤 되는데 아직까지는 뜨겁다. 그 중요한 이유가 일제때 신사참배나 625때 순교한 것이 아직도 지키고 있다고 본다. 신앙은 갈수록 식어진다. 그런데 이슬람은 집단 신앙체제이다. 국가 또는 지역전체가 신앙을 지켜준다. 일년에 한 번씩은 금식기도를 하고 하루에 다섯 번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평생에 한 번 이상 성지를 순례한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거나 지식수준이 올라가면 신앙이 약화된다. 그러나 이슬람은 약화되지 않는다. 국가가 가만두지 않는다. 모두 금식하는데 혼자 금식안 할 수도 없다. 억지로라도 한다.
둘째, 경제성장에 따른 긴장감의 해이
경제와 신앙은 반비례한다. 경제가 성장되면 신앙은 약화되고 경제가 어려우면 신앙이 강해진다. 자기의 경제수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바빠진다. 일 때문에 바빠져서 주일이 되면 쉬고 싶어진다. 교회가고 싶지 않다. 아랫못에 배깔고 비디오빌려보고 있지 교회가고 싶지 않다. 자꾸 교회 가기 약화된다. 가난한 나라에 가면 오히려 시간의 퀄리티가 강하다.
셋째, 종교의 기능적 대행물의 출현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기능적 대행물이 많이 나온다. 종교가 우리에게 마음의 여유를 주고 마음의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는 것들은 종교에서 찾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여행이라든지, 휴일이 증가된다든지... 옛날에는 교회가 제일 재미있었으나 지금 아이들에게는 교회가 가기 싫은 곳이 되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교회가 아니어도 기쁘니깐 교회의 매력이 떨어진다. 독일같은 경우 60년대부터 경제가 성장하면서 3D현상이 나타난다.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것은 안 한다. 이런 것들은 제3세계 사람들을 시키고 자기들은 놀러다닌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고속도로 길가에 교회당 표지판을 붙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 교회가 이동식교회가 만들어져서 휴양지로 가서 교회로 갔는데 그래도 사람들이 안온다.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느냐?라는 설문에 38.2%가 교회에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
넷째, 인구구조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
여성의 사회진출이 무엇을 말하느냐? 이것은 여성의 인권성장에 굉장히 좋은데 교회성장의 요건에는 굉장히 좋지 않다. 여성이 사회진출을 하면 여성이 바빠진다. 그래서 여성의 봉사가 줄어든다. 또 여성은 남성보다 종교성이 강한데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박탈감이 많다. 그래서 한이 많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보상을 받기 원하는데 그것이 종교에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이 직업을 가지면서 직업에 만족을 얻기 때문에 종교에서 보상을 얻으려는 심리가 약해진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으므로 자녀출산율이 낮아진다. 인구가 줄면 교회가 준다.
다섯째,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이단이 많아서 이단 때문에 광신적인 신앙인 때문에 우리도 교회에 가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염려를 한다.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나 삼단이나 모두 교회라고 본다. 그에 반해 천주교는 통로가 하나이고 품질이 검증이 되어 있으니 신뢰가 가능하다. 그다음에 목회자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교회를 불신하게 한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훼손된다. 교회가 자꾸 싸우는 문제가 나온다. 이번에 보니 이혜진양도 교인인데 죽인 사람이 같은 교회 교인이라 한다.
내부적으로
(1) 교회는 이성을 성경위에 두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19세기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철저하게 이성의 잣대로 해부하고 난도질한 것에서 기인한다. 합리주의 자유주의는 철저히 이성을 기준으로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본다.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인 사실을 신화라고 정하고 배척한다.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이야기로 본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겠는가?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떡을 나눠준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꼬불쳐 둔 것은 내 놓으니 어른들이 양심에 찔려 자기 것을 내 놓았다. 예수님 나눠주라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다보니 합리적으로 이해되니 좋은데 성경이 도덕교과서로 전락되고 말았다. 도덕교과서는 성경보다 더 좋은 것이 많다. 유교 불교 그래서 성경이 약화된다. 칼바르트는 로마서주석을 쓰면서 도전장을 던진다. 칼바르트의 중요한 주장중에 하나는 계시를 이성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계시는 계시대로 받아들여라.
(2) 다원주의적 사고의 팽배.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오직 예수.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는데... 계시보다 이성을 위에 두고 있으니 예수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다원주의적 사고가 팽배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 무엇을 우선시하느냐? 이성을 계시 위에 올려둔다. 그러나 계시는 예수님을 통한 유일한 길을 찾는다. 칼바르트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인간은... 개가 우리를 얼마만큼 이해할까? 개가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과의 차이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가르쳐주신 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쓸데 없는 데 신경을 쓰지 말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게 중요하다. 다원주의는 마귀의 입장에서 볼 때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좋은 것이다.
(3) 십자가 없는 윤리로 교회를 약화시킨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더 이상 구원을 위한 책으로 보기보다는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책으로 본다.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고 선한 도덕교사로 본다. 그렇게 때문에 이제 교회와 성도가 해야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사랑을 실천하는 선량한 시민이 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가 된다. 선한 시민이 되는 것은 교회 나오지 않아도 된다. 교회 나온 사람이 선합니까? 나오지 않는 사람이 선합니까? 물론 교회 나온 사람이 깨끗하기야 하겠지만 결국 십자가 없는 도덕으로 교회를 약화시킬 때 결국 교회는 문을 닫게 된다. 교회는 자선기구로 전락하게 된다. 동사무소나 사회복지단체처럼 된다. 교회가 사회복지를 담당해야 하기는 하지만 교회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요즘 세상에 중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아닌가
보수(전통) |
진보 | |
1. 관심대상 |
복음 못 들은 사람 |
특전에서 소외된 사람들 |
2. 목표 |
영혼구원(복음화) |
해방, 샬롬(인간화) |
3. 방법 |
복음전도 |
대화 현존 투쟁 혁명 |
4. 순서 |
개인의 변화 -> 사회변화 |
사회구조 |
5. 주도자(일꾼) |
교회 |
NGO, 유엔, 복지기관, 동사무소 |
6. 장 |
교회(방주) |
세상 |
7. 특징 |
정체성을 지키는데 관심 |
세상에 참여 강조 |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하실 것이다. vs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데 관심이 있다. 교회는 도구에 불구하다. 세상을 강조하다보면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나올 수 있다.
보수의 특징은 지키는 것, 세상이 두쪽이 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지키겠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지킨다는 것이 더 강하다. 세계가 더 복잡해지고 윤리적 결단이 불투명해질수록 단순하게 지키는 보수주의가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보수적인 종교는 부흥한다. 이슬람에서도 원리주의가 부흥한다. 세상이 변하는 것에 따라 함께 변해가는 곳은 쇠퇴한다. 미국도 진보적인 교회와 보수적인 교회가 있는데 진보적인 교회는 쇠퇴하고 있다.
보수의 약점은 한 마디로 무식하다.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른다. 예를 들면 미국이 굉장히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좋은 점만 이야기 한다. 두 번째는 보수적인 사람들일수록 윤리적인 면에서 약점이 많다. 믿음만 강조하다보니 행실에 문제가 있다. 도덕적 감각이 많이 무디어 있다. 그렇다고 진보가 앞서가는 것만도 아니다. 셋째 교회가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적 관심에 무관심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강해서 몰역사적 사고가 팽배하다.
진보는 무엇이 강점이냐? 첫째는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굉장히 합리적이다. 이성을 강조한다. 둘째는 사회문제에 대해 굉장히 예민한 교회가 되고 책임을 지는 교회가 된다. 개인이 아무리 강조해도 바뀌어질 수 없는 구조가 있기 때문에 구조를 바꾸는데 힘을 쓴다. 그러니 보수의 약점이 진보의 강점이고 진보의 약점이 보수의 강점이다.
진보의 약점은 뭐냐? 첫째는 이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성경의 권위를 너무 약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 신성에 대한 것을 유물론으로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활이 진짜 일어났다기보다 상징으로 본다. 둘째는 절대성을 상실하면서 문화에 대하여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문화에 종속당하는 경향을 보인다. 문화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하니깐 어떤 문제가 생기냐하면 일반적인 것이 안 된다. 일반적 복음이 아니라 특수한 복음이 된다. 예를 들면 민중신학,
김명용교수 이시대의 바른 168페이지 이하 통합의 약점에 대해..
첫째, 짜깁기 신학이다.
둘째, 뒷북신학
안승오교수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되지 않는다.
교수의 신학적 관심과 목회자의 신학적 관심이 다르다. 교수들은 학문적인 업적에 관심이 있는 반면 목회자는 그게 아니다. 그러니 잘 배워라. 여러분의 현장에 맞는 신학을 여러분이 만들어가야 한다. 안승오교수는 통합신학이 좋지만 거룩한 실용주의이다. 기준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신학. 그것이 거룩한 실용주의.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면 진보든 보수든 다 좋다.
종교의 양면성
기독교가 종교냐 아니냐? 기독교는 종교의 한 분파다. 바르트는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 한 분파다고 했지만 기독교는 종교다. 종교는 특징이 있다.
하나는 절대성이 있고 상대성이 있다. 종교는 한 마디로 절대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니면 부처다. 예수님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면 그건 이미 종교가 아니다. 이것 아니면 당신은 죽습니다. 그게 종교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면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상대성도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가 상황에 따라서 바뀌어야 한다. 한국기독교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변화에 너무 무감각하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변화만 추구하면 본질 자체가 사라질 위험도 있다.
둘째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종교가 있고 사회에 초점을 맞추는 종교가 있다. 전통적인 종교는 개인이 중요하고 개인의 변화가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개인이 구원받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사회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인류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단계에서 사회로 초점을 맞춘 전환기는 막시즘의 출현으로 본다. 막시즘의 전까지는 모든 문제는 개인에게 있다. 해방신학. 해방신학을 기본적인 전제를 삼는 것이 에큐메니칼신학이다. 그것의 뿌리는 막시즘과 거의 같다. 친척을 이룰정도로.. 종교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느냐?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느냐? 사회에 초점을 맞출 경우에 사람들이 종교를 가질 때에 왜 종교를 갖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종교를 가져야 겠다는 사람이 있느냐? 거의 없다. 어떻게 하면 내가 복을 받고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까에 관심이 있다. 결국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는...
셋째로 종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도 관심이 있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저 세상의 문제도 해결해 준다. 전통적인 종교는 이 세상보다 저 세상에 관심이 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없어질 세상, 아이가 엄마뱃속에서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저 세상에서 살기 위해.. 헌금을 하는 이유는 천국의 은행에 쌓아둔다. 교인들이 왜 순교하는가? 이 세상에서 목숨이 끝나지만 영원한 세상에서 값지고 복된 삶을 살고 싶어서이다. 종말신앙 천국신앙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이 땅에서 강해진다. 내세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로 종교에는 초자연성과 자연성이 있다. 종교는 이성을 갖고 설명을 한다. 반면 종교는 동시에 초자연적인 설명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초자연성이 사라지면 종교는 윤리가 된다.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종교인 이유는 초자연적인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희한한 초자연적인 것이 있다. 종교가 신비의 차원 초자연적인 차원 계시의 차원을 상실할 때 종교는 더 이상의 힘을 잃어버린다. 목회자가 되면 신비한 목회자가 되라. 교인들이 볼 때 뭔가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과의 직통라인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져야 한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목회자를 신뢰할 수 없다. 지금부터 고민해보라. 너무 뻔한 존재가 되지는 말라.
절대성 |
상대성(변화) |
개인 |
사회 |
저 세상 |
이 세상 |
초자연성 |
자연성 |
보수 |
진보 |
[3월 25일]
성경에서는 선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선교의 전반적인 뼈대를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성경과 전통(관행, 교회의 권위, 신학)의 어느 하나를 강조한 때가 많았다. 이 전통이나 관행을 강조한 때가 바로 로마카톨릭 때이다. 그래서 루터가 로마카톨릭을 향해서 일어난 것이 전통보다 교회의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바른것은 전통이나 관행이 아무리 널리 팽배해져 있어도 성경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아니라 해도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것이다. 성경의 최고의 권위에 올려두는 게 바른 신학의 자세다. 예를 들어 생명살림을 봅시다. 생명살림은 자연을 보호하고 생태를 잘 지키는 것 등인데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강조하는 생명은 이땅의 목숨보다는 영생에 상당한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은 육의 목숨보다 영적 목숨에 관심을 두어라고 한다.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 아들을 낳아라.ㅋㅋ 이것은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다.
자유주의자들의 성경을 무시는 관행에 대해서 칼바르트가 반기를 들고 나와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 땅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다. 성경의 권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성경에 최우선순위를 두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성경이 틀린 것 같고 성경이 이성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았다고 해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체가 모순을 갖고 있다. 신이라는 절대불변의 존재를 학이라는 이성을 강조하는 것.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으니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신학이 신보다 학(이성)을 강조하면서 신을 이성의 울타리에 가둬둘려고 한다. 철저하게 신학은 신을 강조해야 한다. 계시를 강조해야 하고 성경을 강조해야 한다. 학은 신(계시, 성경)을 보조해야 한다. 학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학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신학은 신에게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 길은 신학도 아니고 전통도 아니고 우리의 철학적 지식도 아니고 성경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고 성경이 아주 강조하는 것은 강조해라. 성경이 슬쩍 지나가는 것은 우리도 슬쩍 지나가라.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면 성경이 우리를 살린다. 우리의 이성을 강조하면 우리의 목회는 망하는 길로 들어간다. 학자들이 아무리 말해도 성경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는 선교가 잘나타나지 않는다. 요나가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선교는 아니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보면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흐르고 있다. 게오르규 비체돔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로 이루어져있다.”
1. 선교의 근거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 선교의 근거다. 이것이 마태복음 28:18-20의 기반이 된다.
시편 24:1 ...여호와의 것이로다. 하나님이 회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금지된 것이다. 그런즉 오늘날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고 상천하지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져라는 것이다.
타락. 성경은 타락에 대해 언급한다. 타락은 죄와 고통과 사망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교육이나 훈련이나 투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락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타락의 결과를 개인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전반적인 것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전사회적 갱신과 회복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타락은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도 파괴시킨다.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투쟁이나 교육이나 훈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가장 먼저라는 것이다. 사회구조의 개혁, 경제구조의 개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타민족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시33:3 하나님
시60:7-8 하나님의 열방에 대한 소유권이 강조
시9:5 열방에 대한 책망
시7:8, 9:8 열방에 대한 심판_ 심판을 하신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
시2:5 열방에 대해 진노하심
시66: 주목하심
사19:25 나의 백성 애굽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애굽을 향하여 백성이라 한다.
결국 열방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 열방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면 돌이켜 오게 한다. 즉 요나서에도 요나서가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앗수르도 니느웨도 사랑하신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앗수르도 나쁜 나라고 니느웨가 망해야 좋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2. 선교의 목표
구약에 나오는 선교의 목표는 이사야 65:17-25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의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을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의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1)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샬롬)
중요한 특징은 첫째, 사람들과의 관계가 평화로운 관계가 된다(21).경제적인 정의가 이루어짐 둘째,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짐(25). 셋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24).
이런 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선교의 목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20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디에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선교의 방법이 달라진다. 진보는 이 땅에서 보수는 이 땅은 맞겠지만 예수님이 오셔야 가능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2) 하나님께 영광(예배)
왜 우리가 선교를 하느냐? 선교의 우선순위가 무어냐? 복음증거가 더 우선순위다. 사회봉사가 더 우선순위다의 논란이 있지만 선교의 최종적 목적은 구약에서 말하길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시 113: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72: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고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것
사2:1-3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결국 만방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을 최대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결국 선교는 예배가 최종목표다. 영혼구원이 목표가 아니라 예배하는 것이 목표다.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 우주적인 영광송을 돌리도록 만드는 영광송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영광송이 되면서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존재가 이스라엘이다.
3. 선교의 사역자
선교를 누가 하느냐? 하나님의 선교역사는 하나님이 직접하신다고 강조한다. 또 하나님이 교회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기구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해 가신다.
하나님은 택한 사람이 있다.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택하시고 교회를 택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를 들어 쓰신다면 택하실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은 시대마다 택한 백성이 있다.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1) 아브라함(창12:1-3)을 부르셨다.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 이방지역에 가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최초의 선교사라 볼 수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선교의 자세는 창 12:1에 보면 첫째는 떠나라는 것이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 지금도 사실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지금은 떠나는 게 위험한 게 아니지만 수천년 전에 떠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당시에는 보안, 치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떠난다는 것은 자기 재산도 포기해야 한다.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이것이 선교의 정신이다. 편안히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위험해도 손해를 보더라도 떠나야 한다.
둘째는 12:2에 보면 너를 복의 근원, 복 자체로 만들어 주겠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을 때 어떤 상황이었나? 민족을 이룬다는데 자기 자녀가 없었다. 큰 민족은 고사하고 하나라도 주시면 좋겠습니다. 큰 민족을 이룰려면 땅이 있어야 하는데 땅이 없었다. 사라가 죽었을 때 막벨라굴을 사는데 바가지를 쓰고 샀다. 부인 장사를 지낼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없었던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룰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것이다. 믿지 못했으면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선교하는 사람들은 구원역사에 쓰임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복이라는 사실을 잘 믿는 게 중요하다. 내가 복된 사람이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복 된 사람인 것을 믿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전도가 잘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교인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신앙생활해보니 기쁘고 행복하면 전하지 말래도 전한다. 목회자도 자기가 복있는 사람인 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아브라함처럼 자식이 없어도 땅덩어리가 없어도 나는 아브라함처럼 복있는 사람이다고 믿어야 한다.
셋째는 12:3에 보면 나눔의 정신이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을 복 주시는 것이 최종적 관심이 아니다. 모든 민족, 온 세상에 복주시는 것이 최종 관심이다. 결국 우리는 나눠주어야 하고 통로가 되어야 한다. 나누어주다보면 복을 받는다.
2) 모세. 모세의 선교적 기여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고 훈련시켰다.
문제점이 있었다.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자신감이 없었다. 모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다. 나를 바라보면 자신감이 다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출 4: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모세는 부정적이었다. 하여튼 부정적 사고를 없애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데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출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약점도 있었지만 강점도 있었다. 다양한 삶을 살았다.
3)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은 개인을 들어쓰기도 했지만
출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언약을 맺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교백성이 되는 약속을 한 것이다.
첫째, 6절을 보니 제사장 나라가 된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가운데 다리를 놓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리놓는 민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열방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열방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둘째,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구별된 백성, 이방인들과 구별된 사람, 이방인들이 볼 때 저 백성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별되게 거룩하게 살아라.
이스라엘 백성은 진열장속에 있는 민족으로 생각한다. 이방인들이 쳐다보니깐..
출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너희들은 이방백성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한 백성
4. 선교의 방향
성경에는 선교의 운동방향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신약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가는 선교(원심적 선교), 거기에 비해서 구약에서는 열방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다(구심적 선교).
Centrifugal Mission(원심적선교)
Centripetal Mission(구심적선교)
슥 8: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시 68:31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 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구약에 원심적 선교도 나와있다. 디아스포라, 전쟁포로로 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전해진다.
창 26:28
왕하 5:17 나아만의 장군의 여종, 전쟁포로였다.
사 66:19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었다. 구심적선교와 원심적선교에서 구심적선교는 삶을 보여준다. 구별된 삶, 거룩한 삶. 원심적선교에서는 말, 증거.
[4월 1일]
5. 선교의 범위
선교의 대상이 누구인가? 구약성경에 보면 선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품는 선교를 생각했겠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 정도다. 성경에는 배타적인 것도 나타난다.
신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18: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 받지 말 것이니
신 20:17-18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하라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이방인에 대해 철저하게 분리정책, 배타적인 정책을 썼다. 배타적인 영역을 갖고 있으면 선교는 거의 불가능하다. 구약에는 배타적인 영역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개방적, 포용적인 것도 나타난다.
레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외국사람 타국민 거류민이 있으면 잘 모셔라. 앞에서는 배타적이
대하 2:17 전에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조사하였더니 이제 솔로몬이 다시 조사하매 모두 십오만 삼천 육백 명이라
유대사회에 이방인들이 얼마나 많이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룻, 라합이 외국인. 유대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
출 12: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대인만 나온 것이 아니다. 다양한 잡족들이 함께 나왔다. 이 잡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도 선교였다.
대하 6:31-32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걸어가리이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그들이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봉헌기도를 하는 장면, 솔로몬의 기도에는 이방인을 위한 기도가 나온다. 말하자면 솔로몬의 기도가운데 이방인의 기도가 나올 정도로 유대인에게 개방적인 측면도 나온다.
렘 1: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겔 36: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합 2: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말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시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이스라엘은 개방적이다. 그러면 우리가 혼란스러운데.. 어떤 부분에서는 폐쇄적 명령도 내리시고 다른 곳에서는 이방인들을 품어주라고 명령을 내리셨을까? 왜 하나님은 헷갈리게 하시나?
일단 우리는 폐쇄적 명령과 개방적 명령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은 개방적 명령, 즉 모든 사람을 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최종적 목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먼저 이스라엘의 확고한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자체적인 정체성이 세워지기 전에 이방백성과 섞여버리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세계적인 선교의 명령은 최종적으로 중요하지만 그 전에 이스라엘이 자체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의 계획상 이스라엘을 잠시 분리시킬 필요가 있으셨다. 교회가 세상과 하나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회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교회를 바다위의 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교회가 바다(세상)을 떠나서 산위에 있으면 교회로서의 역할을 못 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배가 바다 속에 들어가 물과 하나가 되어 버리면 더 이상 배가 아니다. 철저하게 배가 물 위에 있으면서 물과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 진보신학에서는 세상과 하나되는 그런 교회를 강조한다. 교회가 교회의 강력한 정체성을 상실할 때 교회는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
6. 선교의 방법
첫째, 사랑과 공의의 삶을 말씀한다.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주변나라와.. 주변나라는 철저하게 약육강식, 이기주의로 살아갔다. 가나안의 대부분은 현상유지와 질서에 강조점을 둔 반면 하나님은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약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계시. 가나안의 신들은 가진자의 신이었다면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스라엘을 통해 들여내 보내셔야했기 때문에 주변 나라와 구별되어야 했다. 면제 7년마다, 꾸어준 돈을 면제, 공의와 정의, 구심적 선교 즉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구별되어야 한다.
둘째, 이러한 삶을 살도록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가르쳤다. 설교말씀을 하셨다. 이 설교를 통해서 선지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설교할 때 특별히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겔 3: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겔 3: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가 파는 물건으로 이야기 하자면 세일즈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파는 물건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갈수록 이 복음이 과연 우리의 인생을 확실하게 복되게 할 것이냐? 여기에 대한 확신이 약해져간다.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개인적인 관점에 적용시켜보면 이게 분명히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천국가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회와 구조적인 측면을 보면 복음이 들어간다고 그 사회의 구조가 변화되느냐? 오히려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보수적인 입장은 개인에게 관심을 두고 진보적인 입장은 사회구조에 관심을 둔다. 보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예수를 안 믿어서 그렇다고 본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실로 믿어야 한다.
호세아
셋째, 능력대결. 하나님은 거짓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핵으로 능력을 드러내신다.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신다. 엘리야 갈멜산 대결같은 것
셋째, 고난의 삶을 주문하신다. 하나님의 선교는 고난의 삶을 통해.
사 49:6-7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너의 고난을 통해서 열왕이 일어나고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여기서 고난의 종은 이스라엘 민족을 개인화한 표현으로 본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슨 생각을 했냐면? 자기들이 강대국이 되어 주변나라를 점령하는 강대국이 되어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과 어려움과 핍박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국에 나가서 선교를 하게 된 것은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 끌려간 여자아이. 이 여자아이를 통해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외에도 요셉, 에스더, 다니엘. 이 사람들도 포로나 종으로 팔려가서 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심. 중간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교에 대해 중요한 기여를 한다.
디아스포라가 된다. 디아스포라 때문에 이방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또 바울의 선교가 그만큼 짧은 시간에 그만큼 효과를 거둔 것도 디아스포라가 있었다.
회당. 요람역할, 말씀과 기도중심의 회당예배. 회당 때문에 바울이 선교의 중요거점이 되었다.
또 70인역이 중간기 시대에 번역이 되어 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의 신앙을 지켜주는 뿌리가 되었고 동시에 헬라사람들에게 유대신앙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선교는 우리가 잘살고 부강한 나라가 되고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듯이 힘을 갖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고난받을 때 선교가 일어남을 볼 수 있다.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1. 선교의 근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근거로 본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막 1:15 때가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 증표가 귀신이 물러가고 이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에서 완성될 것인데 눅 14:에 왕의 잔치비유가 나온다. 왕이 종들을 보낼 때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잔치가 다 준비되었다. 잔치의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손님이 없어요. 뺀질뺀질.. 잔치가 이뤄지지 않는다. 손님을 초대하는 작업이 선교다. 선교해야할 근거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시작했는데 완성될 때에 초대할 손님을 초청하는 것
마 22:4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결국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끝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중요한 선교의 근거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냐? 평신도에게 물어보면 죽어서 천국가는 것으로 안다. 학자들은 복잡하게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선교를 제대로 할 것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진보와 보수의 입장이 다르다. 전통적인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으로 임하는 나라, 개인적 차원. 병마가 물러가고 귀신이 쫓겨난다. 진보적인 차원에서는 집단적 차원으로 생각한다. 세계적인 평화가 임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현상으로 본다. 여기는 막시즘의 영향이 크다.
진보 |
보수 |
집단적 차원 |
개인적 차원 |
현재적 차원 |
미래적 차원 |
우리가(교회+다양한 기관들) |
주님께서 하신다. 우리는 전도. |
오늘의 구원(문제해결) |
영혼구원 |
후천년설 |
전천년설 |
구원의 개념도 보수는 영혼구원, 진보는 오늘의 구원.
전천년과 후천년과의 차이는? 진보는 이 땅에 천년왕국을 이루어야 한다. 보수는 도둑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어차피 이 땅에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하나님 나라 이해를 가지셨는가? 예수님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나라다. 또 그 나라는 사회변혁보다는 개인의 회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다. 오스카쿨만은 예수께서 개인의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진 반면 사회구조의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정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개인의 가슴가슴을 변화시킨 나라다.
셋째, 하나님의 선물과 잔치로서의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은 우리가 즐겨쓰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자, 확장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받아라고 하신다. 받는다는 건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을 받는 것이다. 또 들어간다는 말씀도 하셨다. 하나님 자신의 행위다. 또 잔치로 비유되었는데 무한한 기쁨이 누려지는 곳으로 묘사된다.
씨 뿌리는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인간의 동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나라다. 유대인에게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포함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었다. 바리새파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수 있느냐? 우리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킬 때. 젤롯당은 하나님의 나라는 식칼로 임한다. 로마의 핵심을 찔러죽일 때 임한다. 헤롯당과 사두개인은 적당한 타협을 통해서 임한다. 로마와 적당히 타협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뤄진다. 거기에 비해 쿰란파와 에세네파는 이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어렵다.
이 당시에 유대인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하나님 나라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후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입니까?라고 묻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식칼들고 임하는 것도 아니고 빌라도를 죽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땅의 구조를 바꾸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이 증인이 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결국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이해는 어떤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집단보다는 개인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교회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소위 말해서 인간화와 샬롬이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교회의 역할은 인간화와 샬롬을 이루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교회의 위치는 약화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 교회를 통해서 하신다.(보수)
진보적인 입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이 직접하신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하느냐? 하나님이 구원을 어떻게 이뤄가시는 지 잘 보다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인간이 비인간적으로 대우받는 착취나 생태계파괴 같은 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정치적 해방을 시키신다. 동사무소와 협력!
2. 선교의 목표
선교의 목표를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선교의 방법이 달라질 것이다. 과거 선교의 목표는 분명했으나 지금은 상당히 다르다. 무엇이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눅 4:16-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메시야 취임선언서 역할과 같다. 공적인 설교 본문이라 볼 수 있다. 이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취임하셔서 해야할 일은 가나나한 자에게, 포로된 자에게, 눈먼 자에게, 눌린자.... 예수님의 사명은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가난한자, 포로된 자, 눈먼자, 눌린 자를 해방시켜야 한다. 이걸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인간화라고 얘기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선교 목표는 인간화가 되어야 한다. 진보.
반면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예수님의 지상대명령을 선호한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명령이 네 개 나온다. 가서,
제자를 삼아라는 것은 일반 명사형인데, 주된 명령은 제자 삼으라. 제자 삼는 방법은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막 16:15-16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복음전도였다.
눅 24:46-49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요 20:21-22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제자삼음(마) 복음전도(막) 증인되라(눅) 가라(요) 증인되라(행)/ 복음화. 보수
선교의 목표는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 인간화와 복음화. 둘 다 중요한데 그렇다면 둘 다 동일한 가치를 가지느냐? 예수님의 마음 속에 인간화와 복음화가 똑같이 중요한 것이었을까? 사람이 언제 가장 중요한 말을 할까? 돌아가시기 전에.
눅 4:43-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4월 8일]
눅 4:43-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의 주된 목표는 떡을 만들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마 10:43-4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19세기 자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예수님을 휴머니스트, 인권운동가,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과연 예수님이 휴머니스트고 인권운동가고 평화주의자인가? 예수님은 오히려 화평보다는 검을 주러 왔다. 불화하게 된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평화라는 관점, 인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음을 전하지 않아야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행해지고 가정이 깨지고 박살나는 한이 있어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복음보다 우선할 수 없다. 요즘 생명에 대해 많은 말은 하는데 성경에서는 육신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말한다.
선교의 목표, 목회의 목표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적이라면 비논리적이어도 따라가야 한다. 자꾸 우리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하려고 한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많은 진보신학, 해방신학은 자신의 정치토대를 예수님에게서 찾는다. 이 땅에 무언가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예수님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3. 선교의 범위
예수님께서 과연 선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셨는가? 이방민족의 구원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가?
마 10:5-6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의 이 말씀만 언듯보면 선교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마 수로보니게여인에 대한 24절, 26절 자녀의 떡 개
하르낙은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한다. 폐쇄적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폐쇄적 가르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면도 있다.
마 8:11-12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4:15-16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왜 예수님은 둘 다
하나는 계약신학의 관점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먼저 계약을 맺으신 것을 아셨다. 마 26:16 모든 민족.. 첫째 유대인에게... 이방인...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책임을 지신 것이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이 복음이 그들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나아가도록 하셨다.
둘째, 시기적 상황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시기에 대해 민감하셨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님은 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십자가와 부활, 구원사역이 완성될 시점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선교명령은 때가 아니었다. 부활 후에 본격적으로 선교 명령.
셋째, 전략적 상황이다. 제한된 상황에서 시간과 인력이 제한되어 있는데... 선택적 집중이 있어야 한다. 다 할 수 없으니 전략적으로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먼저 보내신 것이다.
넷째, 교훈적 가르침으로 본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나는 이스라엘... 자녀의 떡, 개... 예수님은 일단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 여인의 믿음을 떠 보았다고 볼 수 있다. 그 여인이 그렇게까지 모욕스럽고 치사한 상황에서 매어 달리는 것이지만 축복을 받게 된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끝까지 매달려야 한다.
예수님의 성전청결을 통해서 선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이방인의 뜻을 청결케 했다. 이방인들이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징계를 내렸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며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또 성만찬 제정에서 나타난 선교의 의미
마 26:27-28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떡을 주시고 잔을 주셨다.
출 24:8-11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시내산 언약_ 먹고 마셨다. 피.
예수님도 새 이스라엘인 제자들과 함께 새 언약을 맺으신다. 성만찬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성만찬의 주요 목적_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을 상기시켜 준다.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가 나가서 증인이 되어야 한다.
4. 선교의 방법
우리 주님은 어떻게 선교를 하셨는가?
첫째, 성육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제한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유대땅으로 오셨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들과 같이 낮아지고 그들의 고난과 어려움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선교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선교지에 예수님처럼 성육신해야 한다.
둘째
막 3:13-15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 제자를 키우심으로.. Concentration
선교지에 가서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중국 13억을 가슴에.. 실제로 그들을 품을 수 없다. 핵심인물을 키워야 한다. 핵심제자를 키워야 한다. 예수님도 차별대우를 한 것 같다. 무리 중 제자, 제자 중 3명, 3명 중 베드로. 예수님도 12명 가운데 핵심을 키우신 것 같다. 제자양육, 성도훈련이 중요하다. 다 할 수 없다. 목회를 할 때도 핵심성도가 있어야 한다.
2)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하셨다. Context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시면서 삶 속에서 교육을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주무시는 모습, 코고는 모습, 예수님 발에 꼬랑내.. 좋은 것 나쁜 것 다 보면서 제자들은 생활했다. 선교사는 그의 삶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삶은.. 복음이 진짜 복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능력의 삶을 보여줄 때 사람이 변화가 되는 것이다. 목회현장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목회자의 말씀을 듣지만 나중에는 목회자의 삶을 본다. 예수님처럼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3) 실제적인 변화와 권능 Change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도 내쫓는 권능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권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행 19: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면서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영적인 능력을 영역을 영성을 갖추어 제대로 해야 한다.
셋째, 고난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선교를 이루셨다.
1) 무력성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고난주간을 당하면서 제자들이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무력성.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이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어떤 모습으로 입성하셨나?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 이스라엘 전승 가운데 메시야가 올 때는 백마를 타고 오신다. 그래서 장군처럼 위대한 왕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한다.
2) 죄인의 모습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고 헤롯,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다. 원래 예수님이 영원한 재판장이신데 오히려 인간, 죄인된 인간의 모습으로 재판을 받으신다. 제자들은 이해를 못한다. 예수님의 선교방법이다. 낮아지고 죄인되고
3)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다. 부패한 권력과 만연한 죄악에 대해서 항거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능하게 아무것도 대항하지 못했다. 어느날 해방신학, 에큐메니칼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실패작이다. 반란군을 일으켜서 부패한 정권을 파헤쳐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이루시려고 하는 해방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가 죽음으로서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정의와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결국 선교사나 목사나 목회지에 갈 때 힘이나 권력이나 재력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서 죽으러 가는 것이다.
엔도슈사꾸 “그리스도의 탄생”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갈릴리에서 자라나 예루살렘에서 죽은 사나이.. 오직 사랑만으로 산 사나이.. 무력했으며.. 사랑.. 사랑.. 사랑의 하나님 존재를 증명.. 골고다의 언덕.. 그리스도.. 동반자로..
초대교회의 선교
1. 선교의 근거
1) 부활사건.
마 28:6
천사의 선포와 함께 부활의 아침..
2) 성령
성령에 대해 우리는 여러 관점을 갖는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성령을 구원과 성화를 이루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오순절, 두 번째 사역(성령의 살아 역사하심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 은사를 주신다.
에큐메니칼 성령이해(이 세계에 정의를 가져다 주시는 영, 평화를 가져주시는 영, 생명살림을 가져주시는 영)
3) 이적과 기사
정교회는 초자연적인 차원이 있어야 한다. 종교와 윤리가 다른 것이 무엇이냐? 윤리는 이성적 가르침, 종교는 이성적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이 있다.
제자들도 이적과 기사를 행했다. 오늘날 우리가 신학이 발달하면서 잊혀지고 있는 것이 이적과 기사, 초월적인 차원이 사라진다. 이런 것이 일어나야 한다. 목회자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는 신비함이 있어야 한다. 고민해보라.
중간고사 예제
1. 선교에서 교회성장이 중요한 이유를 기술하고, 오늘날 교회 약화 현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선교(목회) 방향을 논하시오.
2. 종교의 일반적인 특성들을 기술하고, 여기에서 얻은 안목을 가지고 에큐메니칼 선교를 평가하시오.
3. 구약에 나타난 선교의 목표를 기술하고, 이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칼의 선교 목표를 평가하시오.
4. 예수에게 나타난 선교의 목표를 기술하고, 이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칼 선교의 목표를 평가하시오.
5. 에큐메니칼 선교의 목표로서의 인간화에 대하여 논하시오.
[4월 29일]
2. 선교의 목표
영혼구원
행9:19-20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했다.
행 18:
행 28:31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라. 철저하게 복음전도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입만 열었다면 복음이고 그 생각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바울에게 있어서 선교의 목표는 복음을 전하는 것, 영혼구원.
바울은 사회환경개선, 인간화, 죄악된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바울은 인간화는 복음화가 이루어지면 인간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참된 인간화도 복음화 속에 있다. 오늘 목회자들이 복음에 대한 확신이 강하지 않다. 바울은 인간화와 복음화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의 선교를 따라야 한다면 통합측의 선교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통합측은 복음화와 인간화를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 바울은 영혼구원과 복음전도가 선교의 일차적 목표였다.
2) 바울은 현지지도력과 자립교회를 세우는 데 그의 선교 목표가 있었다.
바울이 로마의 동부를 전도하는데 대략 10년정도가 걸렸다고 본다. 로마 동부 지역의 중요 핵심도시에 스스로 서가는 자립교회를 세웠다. 57년 경에는 동부 선교를 잘 마무리 했으니 서부로 옮겨서 선교를 하겠다는 포부를 로마교회에 밝혔다.
자립교회의 설립이 선교의 최고 목표였다. 자립교회가 설립이 되면 나머지 지역에 복음화를 한다. 선교사가 넓은 지역에 모두 복음을 전할 수 없으니 주요거점에 자립교회를 세운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교회 설립이다. 자립교회 설립의 핵심은 헌신된 현지지도자가 잘 서야 한다. 1950년대까지 선교의 목표는 자립교회의 설립이었다. 누구의 선교에 따라서? 바울의 선교에 따라서.
그런데 1950년대 하나님의 선교가 나오면서 교회중심이 되면 선교가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제국주의선교가 될 수 있다. 교회설립만 하면 안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 선교가 된다. 그래서 교회설립을 목표로 하지 말고 샬롬의 구현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호켄다이크가 말한다. 선교의 목적 자체가 사도바울이후 1950년대까지 자립교회의 설립에서 이제 샬롬의 구현으로 바뀌게 되었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아직 자립교회설립을 계속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은 선교의 목표가 두 가지로 힘이 나누어져 있다. 한쪽은 1950년대까지 해왔던 선교를 계속 유지해와야 한다. 다른 한 쪽은 그것이 틀렸으니 샬롬의 구현을 가져와야 한다.
보수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
전세계적으로 성장하는 교회, 성장하는 종교의 한 가지 특징은 보수적이라는 것. 거기에 비해서 현실이 변화되니까 우리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변화를 강조하는 교회나 종교들은 쇠퇴국면에 있다. 사회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한다.
왜 보수적인 교회가 성장하는가?
교회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람에게 제공할 때 성장한다. 이러한 교회는 우선순위에 대한 감각부족으로 다양한 일에 몰입되는 교회와 대조된다.
교회는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성장한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 인권문제, 정의문제, 생태문제는 교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체도 할 수 있다. 거기에 비해서 복음전도는 교회만 한다.
우선순위를 먼저 하라.
3. 선교의 일꾼
1) 사도들
사도들은 모두 순교를 당했다. 베드로는 거꾸로 도마는 인도에서 죽었다.
바나바와 바울_ 급성장하는 교회의 담임목사 격인 바나바는 선교에 헌신
2) 무명의 평신도들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만 안 믿으면 예루살렘에 남아 있어도 된다. 예수 믿어서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나갔다. 이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복음전도. 이들의 관심은 복음전도. 이 평신도들이 열심히 복음전도를 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온 나라에 퍼질 수 있었다.
사도들은 불을 지폈고 평신도들은 일했다. 평신도를 병신도를 만들지 말라. 복음의 역군이 되지 못하면 교회는 자연히 줄어든다. 복음전도에 사활을 걸지 않으면 우리는 미래가 없다. 교회가 없는데 목회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목회자가 없는데 영남신학대학교가 뭐가 필요하겠는가? 미국 유니온 신학교는 학생이 없다. 하다하다 안되니 도서관을 팔았다.
3) 교회들
교회들도 선교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헌신했다. 안디옥 교회가 금식기도 할 때 담임목사인 바나바와 수석부목사 바울을 선교사로 보내라 할 때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 우리 교회는 어떻합니까?하고 토달지 않고 제대로 갖추어진 목회자를 보냄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4. 선교의 방법
1) 현지 지도력 양성
바울이 일차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원래 선교했던 곳을 돌아서 왔다. 일차 선교여행을 하고 계속 앞으로 가면 어찌 되었을까? 왜 돌아갔을까? 장로들을 세우기 위함이다.
행 14:21-23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돌아갔다. 그 이유는 믿음을 굳게 하려고. 환난과 핍박이 있으니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 그리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 장로를 택한 것이 선교의 핵심이었다. 이 장로들은 어떤 장로들이었느냐?
첫째, 본래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은 나이가 좀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재력도 있는 사람. 그래야 지도력이 쉽게 나온다. 나이도 어리고 지위도 없고 땡전한 푼 없으면 지도력이 있을 수 없다.
둘째, 확실한 회심의 체험. 아무리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어도 진짜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체험해야 한다.
셋째, 교회의 헌신도. 얼마나 교회에 헌신을 하느냐?
넷째, 개인의 도덕적 자질. 아무리 이 앞 세가지가 되어도 도덕적 자질이 약하면 안 된다.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되었다. 그러면 이 한국교회는 어떠냐? 되도 않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면 안 된다. 역량이 되는 사람. 브라질에서 장로교는 7년간 교육을 시킨다. 오순절은 2년 신학공부 시키고 그것도 주말에만 대충 시킨다. 장로교 출신은 목회를 잘 못한다. 그런데 오순절은 2년정도 길어야 4년 그런 후 교회개척을 시킨다. 50명을 안 만들면 졸업장을 안 준다. 현장에 강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현지 지도자를 확실한 사람을 세웠다. 그들을 통해서 자립교회를 세웠다. 한국교회의 문제 중 하나가 자립교회가 안되는 것. 계속 선교사를 의존한다. 선교사가 떠나는 날 교회 문을 닫거나 현지 목회자가 교회를 팔아버린다.
바울처럼 스스로 서가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2) 거점도시 중심의 선교
행 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바울이 빌리보에서 쫓겨나서 데살로니가에 갔는데 도중에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그냥 지나친다. 이 도시에 불신자들이 많다. 왜 그냥 지나쳤을까? 이 곳은 거점도시가 아니었다. 데살로니가를 전도하면 데살로니가 교회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전도할 것이다. 오늘날도 선교를 하려면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아예 대도시로 가서 효과적인 선교를 하든지. 아니면 미전도종족에게 가든지
3) 회당을 이용한 선교 거점 확보
회당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다양한 역할을 감당했다. 예배처소, 회의를 하는 시민회관, 학교, 잠을 자는 여관의 역할, 직업알선소의 역할을 했다. 회당에 가서 이 지역에 텐트 만드는 집이 어딘가? 아굴라 브리스길라 집도 소개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외국에 있는 한국교회가 이런 역할을 한다. 한국교회가 소망이 있다. 선교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회당 예배는 개신교 예배의 모체가 된다. 회당예배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동물제사를 못하니 기도의 제사를 드린다. 또 말씀을 가르쳤다. 그래서 모세오경의 한 부분, 선지서의 한 부분. 52주 동안 읽을 본문이 정해져있다. 렉셔너리가 정해졌다. 회당장이 렉셔너리가 정해져서 그 본문을 읽는다. 오늘 말씀을 연관해서 위로나 권면의 말씀을 해 주실 분 나와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때 바울이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회당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느냐?
첫째, 유대인
둘째, 개종자. 할례, 율법의식. 유대인으로 귀화한 사람들. 개종자들은 오나가나 찬 밥이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이등신자들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어느날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자유방임형으로 생긴 사나이가 나타나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율법을 그대로 지키지 않아도 된다. 구원받는 길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더 많은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바울은 회당부터 찾아갔다.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선교의 특색.
첫째, 수용성이 높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지역마다도 다르다. 영남지역은 복음화가 10%도 안되지만 호남은 4-50%가 된다. 순천은 거의 복음화.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다르다.
둘째, 수용성이 강한 지역이 있다. 같은 대구라도 인구이동이 많다든지..
셋째, 사람도 수용성이 높은 때가 있다. 실패할 때. 회사에서 잘릴 때. 몸에 병이 들때, 이사할 때. 이럴 때 수용성이 높다.
위기가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 기회다.
4) 팀선교
바울은 동역의 중요성을 알았다. 바울은 혼자 선교에 나선 적이 없었다. 늘 동역자와 함께 다녔다. 바울서신을 보면 우리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바울 서신을 시작할 때 동역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동역자의 역할은?
첫째, 교회의 소식을 알려옴.
둘째, 바울의 지시를 그 교회에 전함
셋째, 바울 대신에 일정기간 교회에 남아서 교회를 도움
동역자들이 없었다면 바울의 선교가 효과적이었을지 의문이 든다. 바울의 동역자는 갈수록 많아졌다. 지금 한국선교가 바울의 동역선교에서 배울 것은 바로 동역하는 정신이다. 한국사람은 이것이 좀 약하다. 내가 혼자 하는 것은 잘하는데 남 밑에 들어가면 잘 못한다. 한국교회가 은근히 그것을 부추기도 한다. 누구 밑에서 선교한다면 교회가 왜 밑에 있냐고.. 따로 세워. 남 밑에 가서는 안 하려고 한다.
5) 상류층도 포함하는 선교
바울은 선교를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바울이 선교 했던 사람은 하층민들을 많이 상대했구나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루디아는 엄청난 부자였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의 석방을 위해서 보석금을 내 놓았는데 야손과 귀부인. 그리스의 귀부인들이 바울을 쫓았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소동이 일어날 때 극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시아의 관원이 말렸다.
바울이 이룬 상황화
유대인들의 경우 할례받고 믿고 비유대인들의 경우 할례받지 않고 믿는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본질을 지켰다.
상황에 따라서 복음의 옷을 달리 입히는 것이 상황화이다.
바울은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지역의 상황과 요구에 맞게 했다. 유대인을 만났을 때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설교한다. 그 하나님이 약속한 사람이 예수님이다. 구약부터 접근
이방인들 중 철학적으로 수준이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철학적으로 접근. 우주적인 신을 이야기 하고 그 분이 하나님이다.
이방인 중에서 철학적인 수준도 없고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은 일단 기적을 먼저 베푼다.
상황화는 내용을 상황화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상황화한다. 복음의 옷을 상황화. 그러데 상황화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 내용자체를 상황화한다. 이 때는 복음의 능력을 잃게 된다. 절대 내용은 건들지 마라.
[5월 6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900년대까지는 복음전도와 교회개척
1910년 에딘버러 대회
1952년까지는 선교의 목표가 무엇인지 방황하는 시기
1952년 하나님의 선교개념이 나오면서 선교의 목표가 확연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계속 해서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자립교회 설립)을 계속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다른 한쪽은 선교의 목표를 복음전도와 교회개척만하면 이기적인선교가 되니깐 샬롬을 위한 선교를 하자. 전세계를 대상으로 모든 인류를 평화롭게 만들고 잘살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답게(인간화). 단순한 개인구원만이 아니라 사회구원도 해야 한다
지금은 이 두 쪽이 많이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다. 이 둘은 생각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다.
에큐메니칼 신학과 에반젤리칼 신학- 이 둘을 하나로 만들기 보다 서로의 갈 길을 가야한다.
그런데 에큐메니칼의 문제는 WCC를 중심으로 일을 하는데 WCC의 신학이 개교회에 와서는 곤란한 게 많다.
에큐메니칼?
헬라어의 오이쿠메네에서 나왔다. 오이쿠메네는 살다, 거주하다의 오이케오 + 집이라는 오이코스라는 말, 즉 집과 살다라는 말에서 오이쿠메네가 나왔는데, 세계, 대지란 뜻이다. 전지구 또는 로마제국, 초대교회에서는 전교회, 혹은 교회의 우주적 타당성을 말한다. 오늘날은 전세계 교회의 일치, 또는 기독교 일치, 전세계교회의 선교의 뜻을 지니고 있다.
오이쿠메네는 전~ 세계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전세계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인가? 전 세계 교회뿐만 아니라 종교까지도 일치를 갖게 되는데...
에큐메니칼은 전 세계를 하나로 보고 일치를 갖는데 관심이 있다.
전 세계교회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은 좋은 일인데... 전세계 종교를 하나로 생각할 때는 문제가 생긴다.
WCC운동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_ 협력선교를 논의. 두 가지 기구가 생겼다.
1925년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그리스도의 봉사와 책임을 과제로 삼았다. 봉사는 연합시키고 교리는 분열시킨다. 교리는 달라도 함께 봉사하자. 목표는 서비스, 사회참여. 기독교윤리분야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1927년에 ‘신앙과 직제’라는 기구가 생겼다. 교회가 분열되는 이유가 신학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교회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신학연구, 공통된 교리, 교회론 등을 만들어서 하나가 되기 위함. 주된 목표는 unity. 조직신학에 해당. 1938년에 합쳐짐
1948년 wcc란 이름으로 발족.
1921년에 IMC라는 기구가 생겼다. 1961년에 IMC와 WCC가 통합됨. WCC가 IMC를 흡수통합할 때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선교니까 IMC가 들어와라. IMC가 막상 들어가니 CWME라는 기구로 발전.
[5월 20일]
wcc신학을 왜 살펴보아야 하는가?
일단 우리 교단이 wcc에 가입되어 있고.. 복음주의쪽에도 가입되어 있다. ncc, 한기총에 가입.
선교와 관련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신학이 wcc 신학이다. wcc신학의 강점과 약점을 알지 못하면 문제가 있다.
wcc 즉 에큐메니칼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WCC의 회의를 통해 알아보자.
패러다임을 알아야 한다.
1) 선교를 위한 협력 패러다임(1910에딘버러-1948암스텔담)
IMC를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1910년 에딘버러선교대회는 최초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로서 세계 많은 곳에 선교사들이 나가 있는데 어떡하면 이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중복되지 않게 사역할 수 있을까?/ How의 문제/ 이 세대 안에 전 세계의 복음화
1928년 예루살렘대회_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인간이 약한 존재이다. 세속주의와 타종교와의
모든 것은 역사적으로 연결지어져 있고
역사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신은 한 분이 아니고 여러 분이다.
윌리암 호킹 “Re-thinking Mission” 100년 후의 한 평신도의 탐구
종교다원주의
헨드릭 크래머 “the christian message ” “비기독교세계의 기독교 메시지” 칼바르트의 신학에 근거해서 종교와 계시는 다른데 모든 종교와 기독교복음을 완전히 구분시켜 놓았다. 기독교 복음과 타종교 사이에서는 연속성이 없다. 타종교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1938년 탐바람 대회는 헨드릭 크래머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독교복음은 유일한 것이고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다.
1947년 휘트니 대회_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제3세계,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가 독립을 함. 협력과 동역을 매우 강조함. 파트너십 인 오베이든스 “순종안에서의 동역” 서구교회와 비서구교회로 나누지 말고 차별대우하지 말고 함께 동역하자.
1948년 암스테르담대회_ WCC창립총회가 열림.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기획”
전쟁의 악마성을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폐해와 공산주의의 횡포를 지적함. 전쟁 후에 세계를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교회를 어떻게 갱신할 것인가 논의
2. “하나님의 선교”패러다임 (1952년-1961년)
하나님의 선교란 한 마디로 지금까지는 교회가 선교를 주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교회가 주도했다면.. 이제부터는 교회는 도구일뿐이고 하나님은 사역하신다.
인간은 하나님 밑에.. 하나님이 일하신다.
호켄다이크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하나님이 교회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복음전도.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는 복음 전도보다 사회변혁, 복음화보다는 인간화를 강조.
하르텐슈타인 감독이 처음 말한 의도는 하나님의 지배아래 놓아야 된다는 것으로..
옛날에 복음전도를 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는데 복음전도만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1952년 빌링겐대회가 열림_ 선교대회를 했는데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계속 됨. Missio Dei하르텐슈타인이 만듦
이것을 비체돔, 호켄다이크가 발전을 시킴. 비체돔은 구원사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했고 호켄다이크는 실현된 종말론으로 해석함.
1954년 미국 에바스톤대회_ wcc2차 총회가 열림.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소망”이란 주제로 열림. 하나님의 선교개념이 세상에 관심을 갖다보니 이 세상이 ... 절망의 상황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이 된다.
1961년 뉴델리_ wcc3차 총회, 2차 총회와 비슷한 주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 사회구조의 변화와 소망. IMC를 WCC로 흡수통합하는 일. 로마교황청이 공식적인 옵저버를 보냄, 러시아정교회가 공식 회원이 됨.
뉴델리 3차 총회부터 천주교가 상당히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3. “인간화”패러다임 1968-1980년
하나님의 선교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 인간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교 패러다임이 인간화로 넘어옴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림 “보라 내가 세상을 새롭게 하노라”라는 주제.
만유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이땅에 샬롬을 이루고 인간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의와 평화의 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강렬하게 다룸. 웁살라대회는 인간의 사회가 어느 때보다 파괴적인 힘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물질적 빈곤을 해결하는 것이 영적빈곤을 해결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강조.
가장 좌경화된 대회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1963년까지 신학을 주도했던 사람이 칼 바르트. 칼바르트는 수직적 관계회복이 수평적관계회복보다 우선된다고 했다. 1963년부터는 수평적관계회복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회복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1972년말부터 1973년까지 방콕 CWME회의가 열림
여기서 구원론을 새롭게 정립. 1973년전까지 구원이라고 하면 예수님 믿고 천국가는 것. WCC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구원.
구원의 개념을 바꾸었다. 방콕에서는 인간화가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았다. 수직과 수평을 둘 다 포함하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결국 한 마디로 구원은 해방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옛날엔 전도지 나누는 것, 이제는 머리에 띠 두르고.. 투쟁하는 것.
1974년 복음주의자들이 로잔에서 대회를 염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_ 복음화와 인간화가 동일한 것이 아니고 복음화가 우선이다.
이 얘기를 듣고 1975년 나이로비에서 5차 총회가 열림. 이 총회는 최대한 복음주의 시각과 에큐메니칼 색을 같이 내고자 애섰다.
해방자 예수를 부각되었고 해방신학과 토착신학이 강조되면서 삶의 신학, 행동신학도 강조
그러면서 교회가 사회에서 평화, 자유, 정의 실현을 위해 투쟁해야 됨을 강조.
나이로비 대회는 눌린자에게 자유를.. 100년 전 포기한 용어가 등장, 마르크스.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 선교는 해방시키는 것이 선교
4. 생명 패러다임(1980-현재)
1989년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자본주의와 막시즘의 대결 가운데 막시즘에 대한 신뢰가 상실됨. 막시즘은 현실성이 없는 이데올로기. WCC도 인간화의 패러다임을 막시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본다. 막시즘이 폐기처분된 이데올로기. 막시즘으로부터 해방신학이 나옴. 그래서 해방신학에서 생명신학으로 전환됨.
1991년 호주 캠빼라 “오소서 성령이여”라는 주제로 열렸다. 전쟁무기와 다량살상, 테러, 환경오염, 인권탄압들로 인해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생명이 무너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 이 일은 성령께서 할 수 있다. 당시 이화여대 정현경교수가 개막예배의 진행을 맞았다. 하얀소복을 입고 입장을 해서 한 맺힌 영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당춤을 추었다. WCC는 상반된 반응을 일으켰다. 한쪽은 신성한 성령이해다. 다른 한쪽은 성령과 사령을 구분못하는 혼란함이 있었다. 세속적인 영 이해, 타종교의 영 이해를 기독교적 영 이해로 수용하는 문제를 낳았다.
생명살림을 강조
1998년 희년 총회로 모임. 짐바부 하라레.. 주제 “하나님께 돌이키라 ...”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다. 생명의 신학이 주제,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존을 강조. JPIC를 강조. 생명을 강조.
지금까지의 성령론도 그리스도라는 안경을 끼고 성령을 바라본다. 전통적인 신앙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삼위일체지만 하나님을 바라볼 때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창조주 하나님도 강조하지만 구속자 하나님을 강조, 성령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보면서 이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분으로 보기 보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완성시키는 분으로.
그런데 WCC는 창조의 관점으로 본다. 성령님도 창조사역을 이루시는 분, 생명의 풍성함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성령님.
결국 만유구원론으로 흐를 수 있다.
창조와 구원이 있는데 전통적인 신학은 구원을 강조하다보니 예수님을 강조했고 에큐메니칼 신학이라든지 몰트만의 경우 창조를 강조하다보니 다원주의로 흘러가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2006년 브라질 포르토밀레도 “하나님 당신의 은총으로 이 세계를 변화시켜주옵소서” WCC의 관심은 세계에 가있다.
남미는 해방신학이 유명하다. 결국 9차 총회는 지금 빈곤이 세계화 되어 있고 전쟁과 갈등이 증폭되어 있고 자연과 에이즈의 재앙이 심각하다. 절망의 신음이 가득찬 세상을 우리가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WCC총무의 이름이 코비아, 코비아 총무가 에큐메니칼운동의 비전을 생명의 잔치라고 했다. 에큐메니칼은 생명을 심고 생명을 가꾸어야 한다.
100년정도 된 에큐메니칼 운동을 요약해봤는데 처음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선교를 협력해서 잘할 수 있을까?에서 하나님의 선교, 인간화, 생명으로 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생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과는 좀 다르다. 성경은 영생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얻는 영생의 초점이 가있다.
[5월 27일]
신학은 당시의 시대 철학사조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보수적인 신학은 체질상 외부의 영향에 대해서 거부하는 입장이다. 자기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거부하고 진보적인 입장은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WCC신학은 상당히 진보적인 신학이기 때문에 철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영향은 계몽주의.
계몽주의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이성의 강조다. 계몽주의의 대가라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인식이 출발점이다. 어떤 전통이나 규범으로부터 철저하게 해방되어 모든 것을 이성으로 판단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판단해서 이성에 맞으면 진리고 이성에 맞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고 본다.
계몽주의에서는 가치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나누고 교의와 실제의 세계를 나눈다. 확실한 것, 이성으로 지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것만으로 받아들인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끝이다. 그런데 계몽주의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랬어? 그러면 판단해보자. 이성으로 판단한다. 진짜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 판단하고 하나님이 왜 말씀하셨는가 등등의 판단을 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성의 심판대에 올려두고 난도질을 하게 된다. 자유주의나 비평학설의 뿌리가 계몽주의의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는 탐구와 계발의 상태로서의 자연
자연에 대해 인간이 순응하고 자연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자연은 목적을 가지고 나아간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계몽주의가 발달하면서 세계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자원의 집합체이다. 그래서 자연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기적이라는 것을 믿었는데 이것은 자연현상의 예외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과거에는 임신, 출생, 질병, 죽음 등은 신과 연관해서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히 신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니 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그런 것이고 병균이 들어가서 그런 것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신보다는 과학을 더 의지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진보에 대한 확신.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이제는 인간은 계속해서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자연의 악마적이고 외적인 힘은 인간의 계획과 노력에 의해 복종되어지고 인간은 세상을 재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구상에 물질적인 파라다이스를 이룩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향을 미친 것이 후천년설이라든지 지상왕국.. 얼마든지 신의 도움이 없이도 인간스스로 이땅에 지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 후천년설은 WCC에서 많이 나타난다.
네 번째 과학은 사실이고 가치중립적이다. 종교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각각의 종교에 하나의 믿음의 표현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과학과 분리시켜야 한다. 종교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보편성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는 종교 상대주의가 나올 수 있다. 하나의 종교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처럼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본다.
다섯 째는 인간의 자율적이다. 중세에는 모든 인간은 신을 중심으로 생각을 했다. 인간이란 무어냐 신의 뜻대로 맞추어야 하고 신의 뜻대로 살아야 했다. 또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와 관계를 맺은 존재였다. 그런데 계몽주의 사고가 발달되면서 신은 존재한다고 해도 자연 밖에서 존재하고 무능함으로 이 셰계와 관계없음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이신론의 신학이 나타난다. 더 이상 신은 인간역사에 개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계몽주의 사고에서는 개인이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계몽주의를 탄생시킨 정신이 르네상스. 신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르네상스와 맥을 같이 하는 계몽주의는 인간의 행복추구에 관심을 가졌다. 신의 영광은 더 이상 자리 잡을 수 없었다.
WCC의 인간화의 개념은 신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학이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장신대 이종성교수가 신앙과 신학의 소책자에서 자유주의는 무엇이든지 낡은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가치가 있으면 받아들이고 없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치판단의 기준은 자기에게 있다. 성경이든 교리든 오늘날 가치가 있는 것이면 받는 것이고 가치가 없으면 쓰레기처럼 버린다. 이 판단의 기준은 자기의 머리다.
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이성을 계시위에 둔다. 과거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여 일점일획도 바뀔 수 없지만 이제는 성경은 책이 되어 이성으로 판단한다. 결국 불트만이라는 학자는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성경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신화라고 본다. 있지도 않은 사실, 말하지도 않은 사실을 초대교회가 신화로 만들었다. 역사적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다. 복음서는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며 케리그마로 받아들여야 한다.
헤밀턴교수 신죽음의 신학을 강조.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의 존재는 부인되어져야 한다.” “성숙한 세대는 신의 힘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신 죽음의 신학의 결론은 신은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살아있다. 윤리적 모델로서의 인간 그리스도는 살아있다. 윤리의 가장 좋은 모델이다. 우리가 어떻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따라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된다.
막시즘의 영향
막시즘을 탄생시킨 이론
1 잉여가치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헤친 것으로 자본을 가진 사람은 자본을 가지고 자본 없는 사람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만드는 데 그것을 가지는 사람은 고용자가 받는다. 이것이 모순된 것이다. 모순되다 보니 갈등이 생긴다. 갈들이 생기면서 정반합의 원칙에 따라 역사는 진보하고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이루어진다.
2 유물사관
막시즘에 의하면 모든 것은 물질에 의해서 규명된다. 기독교는 정신이 물질을 주장한다고 가르쳤지만 살다보면 물질이 정신을 규명하고 물질이 사람 됨됨이를 규명한다. 물질이 바뀌면서 사람이 바뀐다. 로또.. 1등 당첨... 인간의 모든 불행원인은 하나님을 못 만나서 불행한 것이 아니고 물질이
결국 인간은 정반합의 변증법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물질을 갖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런 공산주의는 물질을 많이 가진 자본가계급을 몰락하기를 원한다. 가지지 않은 사람이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계급투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막시즘의 장점
사회분석을 위한 매우 적절한 도구를 제공한다. 예전에는 내가 열심히 일을 안해서 가난했다. 내가 불성실했고 내탓이다. 막시즘을 배우고 나니 내 탓이 아니고 사회탓이다. 자본가를 더 이롭게 하는 사회구조 때문에 내가 가난하고 불행하게 된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막시즘이다.
자본주의도 막시즘 덕분에 수정자본주의가 된다.
노동운동이라든지 세제혜택 각종혜택은 막시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막시즘이 갖고 있는 중요한 착각
1 물질만 있으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 유물사관
2 부자는 빈자보다 행복하다. 과연 부자가 빈자보다 행복하냐?
3 우리가 평등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이 역사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로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만든 체제가 공산주의다.
4 인간이 욕심의 존재라는 사실을 몰랐다. 인간은 언제 죽어라고 일하냐? 그것은 내 것, 나에게 이익이 될 때.
막시즘이라는 것은 개인을 바꾸어서는 백날 가도 소용이 없다. 구조를 바꾸어야 하고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가 바뀌어지냐 그렇게 때문에 투쟁과 혁명이 있어야 한다. 막시즘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해방신학이다. 1960년대부터 남미를 중심으로 해방신학이 나타났는데 WCC는 하나님의 선교 위에 해방신학을 두게 되었다. WCC의 핵심적인 브레인들이 해방신학을 갖고 있는 사람들, 구원은 개인적으로 성취한다. 아무리 구원을 받으려고 해도 구원이 안 된다. 평등하고 샬롬이 넘치는 사회가 되어야 구원이 된다.
장신대 김명용교수 “통전적 신학”에서 통전적 영성신학(149페이지)에 해방신학의 영성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 일치시키는 방법.. 편향적인 점이다. 정치화되어서.. 정치운동.. 구별되기 어려운 점, 하나님과의 만남.. 소홀히.. 문제점“
해방신학은 너무 편향적이고 너무 정치화되었다. WCC신학이 받아들였다.
WCC는 해방신학, 막시즘의 영향이 있다.
세 번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1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개인과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강조. 모더니즘은 개인을 강조. 결국 집단이라는 것도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개인을 강조.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공동체를 강조.
2 합리성과 비합리성가운데 모더니즘은 합리성을 강조.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성과 객관성이 꼭 맞는 것이 아니라고 깨닫는다. 모더니즘에서 종교는 자연히 소멸될 것이라 보는데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종교가 사라질 거라 했는데 오히려 종교가 더 강화되어가고 있다. 합리성을 해결할 수 만 없다.
3 객관적 지식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은 보이고 실험되고 검증되어야만 했는데 근데 객관적인 진리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라는 회의를 갖게 되었다. 완전한 가치 중립적인 해석이란 있을 수 없고 사실과 가치의 사이에 명백한 구분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적 실증주의, 과학이라는 것도 완전히 객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도 연구자의 주관과 선입견이 들어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신에 대해서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고 본다. 한 마디로 잘 모르겠다. 신이해를 절대로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4 과학기술
인간은 과학기술이 진보될수록 오히려 불행해진 영향도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구온난화나 병을 정복하는 속도보다 병이 발전하는 속도가 빠르다. 결국 인간이 철이 들어보니까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는 것이구나라고 느낀다. 인간은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 없구나라고 철이 든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성의 상실이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어서 모든 것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결국 이것은 다원주의에 영향을 주게 된다. 종교간의 대화나 종교다원주의는 절대성의 상실이다.
계몽주의 이성 > 계시
막시즘 인간화 > 복음화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성 > 절대성
WCC의 기여점 및 문제점
기여점
1 범세계적인 교회의 연합에 기여를 했다. 선교를 수행할 때 각계전투로 하면 힘의 약화가 일어난다. WCC는 교회의 연합을 강조하다 보니 WCC의 정신으로 연합전선을 펼침으로 선교를 할 수 있다.
2 세계교회연합회체다 보니 세계교회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천주교가 강한 이유는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개신교는 다 지가 잘났다. 그래서 개신교는 국가에서 볼 때 우습게 본다. WCC의 목소리는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3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성을 일깨워준다. 예를 들면 경제정의 문제, 평화문제, 교회가 교회자체만을 강조하고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면 역행하는 것이다. 창조보전의 문제.
[6월 3일]
문제점
1. 복음화의 약화
WCC의 방향은 말은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통전적으로 나간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말을 평가하느냐 행동을 두고 평가하느냐? WCC는 사도적 헌신에서 봉사적 헌신으로 바꾼 듯한 경향을 보인다. 그 몇가지 예를 볼 수 있는 게 첫째는 기구조직표와 예산을 볼 때 과거 IMC(CWE)가 굉장히 약화되었다. WCC의 대부분의 돈을 해방운동이 일어나는 곳에 보조를 한다. 제3세계 유학생교육비, 반백인투쟁단체 후원 등.. WCC가 통전적으로 한다면 50%는 복음전하는 데 50%는 인간화에 쓴다면 괜찮을텐데... 그게 아니다.
학자들의 평가를 보면..
에큐메니칼운동의 대부라 볼 수 있는 이형기교수는 세계교회협의회라는 얇은 책을 WCC에서 나오는 책을 번역하고 부록을 썼는데 에큐메니칼고찰 231페이지에 .... 교회의 역사와 사회 참여를 이룬 것은... 그러나 에딘버러 이전의 복음주의 선교열의에서 점점 멀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19세기의 복음적 선교의 열의로부터 거리가 멀다. 1975년 나이로비 이후 통전적선교를 지향했다. 복음전도와 인간화를 구분하는 것을 싫어한다. 역시 복음적 열의는 멀어져갔다.
한마디로 WCC는 기독교의 존립의 원동력이 복음인데 복음을 전해야 기독교가 있는데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살 수 없다. 이것을 약화시키는 게 문제다.
2. 교회의 약화
에큐메니칼 신학의 가장 파운데이션에 하나님의 선교신학이 놓여있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교회의 선교신학에 대한 대안으로 출현한 것이다. 교회중심적인 교회설립을 목표로 세우는 교회선교신학은 한마디로 제국주의 성격을 낳게 되는 문제점을 낳게 된다. 그 문제점으로 출발했다.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좋은 기여점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에큐메니칼신학의 약점은 선교의 목표를 교회설립으로 삼지 말고 샬롬으로 삼아라. 목표가 많이 바뀌어진 것이다. 지금 이 세기에 아직도 복음화가 천주교까지 다 합해서 30%인데..
과거에는 교회가 아니면 선교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복음은 교회만 맡고 있다. 교회가 해야할 일은 목숨내걸고 복음전하는 사명을 갖게 되는데..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가 아니어도 다양한 기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진다.
3 효용성의 문제
WCC에서 제시하는 선교의 목표는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다. JPIC. 얼마나 좋은 이야기인가? 그런데 문제는 가능성이 있느냐다. WCC는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 문제점이다. 두 마리 토끼를 한 꺼번에 잡는 것은 쉽지 않다.
고대교회는 기독론 중세 성례 종교개혁 구원론 현대 교회론
선교의 핵심기구는 교회.. 선교를 하면 교회가 세워진다. 교회가 선교의 시작이고 선교의 마지막이다. 그런데 1952년 하나님의 선교개념이 탄생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중심적인 위치에서 벗어났다.
옛날에는 교회가 구원의 유일한 기구였지만 지금은 하나의 예표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뭐냐? 교회가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하느냐? 혼선이 일어난다. WCC의 교회 이해를 살펴본다. 에반스톤회의부터 WCC의 교회 이해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교회는 사회참여를 강조, 세계정치와 경제에 참여, 1968년도 세계 인간화에 기여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 논문을 읽어보라
교회는 구원의 진리를 배타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타종교에 대해 닫힌 자세를 버리고 타종교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하라.
결국 이제 WCC의 대회를 보면 복음화에서 인간화, 샬롬으로 나타나다가 나중에 교회가 구원의 독점적 기관이 아니라 여러개 중의 하나로 전락한다.
교회이해 주된 특징
1 교회위상
교회는 유일하게 구원의 소식을 가진 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현존.. 또 세상에 부가된 하나의 첨가물에 불가하다. 교회가 유일한 기관이 아니다. 하나의 예시, 하나의 지시자라는 것이 에큐메니칼의 관점. 교회가 구원의 소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전통적인 교회관은 세상의 불러냄을 받아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에클레시아) 또 다른 사람도 에클레시아로 불러들이는 것이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구원의 독점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강조되는 경향을 가지면서 이형기교수는 패러다임.. 576페이지에서 탈교회중심적교회주의라고 한다. 교회는 절대적인 존재라 아니라 여러 가지 기구
2 교회목표
예전에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는데 에큐메니칼에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제국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인간화를 이루는 것, 샬롬을 이루는 것. 더 이상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
3 교회의 장
교회가 어디 있느냐? 옛날에는 교회가 세상 밖에 있었다고 본다. 세상으...
이제는 교회가 무슨 일을 해야하느냐? 예전에는 성경을 보고 찾았는데 이제는 세상이 말해준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칼 교회이해의 평가
1. 세계적관점에서 기술된
전통적으로 교회를 볼 때 교회를 정의할 때 성경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제는 성경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바라본다. 세상의 관점에서 교회를 본다. 이 경우에 어떤 장단점이 있느냐? 장점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창조세계를 보전하는 일에 기여하는 교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교회가 과연 그런 일을 하게 부름 받았느냐? 교회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느냐?
너무 세상적으로 구원개념을 서술하다보니 정치, 경제, 사회적 구원을 말하게 된다.
2. 세계변혁에 대해서 책임적인 교회관
에큐메니칼은 교회가 더 이상 교회를 위해서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계 평화, 이것의 장점은
교회가 약화될 수 있다. 피터버그가 얘기하기를 세상에 부흥하는 종교들은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든지 간에 원래 신앙을 붙드는 종교는 부흥한다. 사회 책임을 강조하는 교회들은
3. 세상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교회관
전통적인 교회관은 세상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다. 요한일서에보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은 결국 망할 대상, 소망이 없다. 세상에 대해 미련을 끊어라. 여기서 문제점은 세상에 너무 무관심하다.
에큐메니칼은 세상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를 분리해 낼 수 없다. 조금 더 나아가게 되면 이 세상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나갈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에큐메니칼의 교회관은 목적을 매우 강조한다. 세계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동력이 없으면 목적이 무용지물이다. 에큐메니칼은 세상과 연대를 강조하고 하나됨을 강조한다. 세상과 교회가 하나가 된다면...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어야 한다. 지구
이번 학기를 총 마무리 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1. Think globally act locally
3 가장 인간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복지국가가 된다고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만이 우리의 나아갈 길이다
4 결국 성경을 붙들어라 행 20: 바울이 에베소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말씀을 붙들어라고.. 성경이 우리의 살길이다. 모든 신학도 성경을 이야기 한다.
신학은 교회를 살리는 학문이다.
기말 고사 예제
1. 초대교회에 나타난 선교의 목표를 기술하고 이에 근거하여 에큐메니칼 선교를 평가하시오.
2.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약술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된 경향을 평가하시오.
3. 에큐메니칼 운동에 영향을 준 사조들을 기술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평가하시오.
4. 에큐메니칼 교회 이해를 기술하고 바람직한 교회이해를 논하시오.
5. 생명살림에 대하여 논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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