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이형기 (장신대 명예교수)
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와 그것의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1. 에큐메니칼이란 말의 뜻: 에큐메니즘, 에큐메니시티(ecumenicity) 및 에큐메니칼이란 단어는 희랍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의 어원은 oikos(집)인데, 이로부터 oikonomia(집안 살림살이 = managing of the household)란 말이 나왔고, 이루부터 economy(경제, 그리고 신학에선 ‘경세’)와 ecology(생태학)란 말이 나왔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the whole inhabited world)이다. 희랍-로마 세계(the Greco-Roman World)에서 이 “오이쿠메네”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세상, 문명세계 혹은 희랍-로마 문화영역, 나아가서는 로마 제국을 의미했다. 신약성경에선 이와 같은 세속적인 의미로 15회 가량 사용되었고, 2-3세기에 이르면 이 용어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 속에 지역별로 흩어져 있는 세계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4세기에서 5세기 동안에는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처음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로 “에큐메니칼”이라는 말은 획기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그것은 교회들의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하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 교회의 사회참여에 해당하는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선교를 추구하는 “복음전도와 세계선교” 운동과, 이 세 운동의 신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세 운동이 WCC의 세 기둥인 바, 이 WCC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도구로서 세계교회들의 공식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1975년 ‘나이로비 세계교회 협의회’의 JPSS(A 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 = 하나의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회) 이후 오이쿠메네의 의미는 창조세계 보전 차원에서 온 우주를 아우르고 타 종교들과의 대화도 포함하고 있다. 1983년 벤쿠버 WCC 총회 이래 오늘날 세계교회의 중심과제는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 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가 되었다.
2.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경적인 의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인류를 하나님께 화해시키시는 대제사장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라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한 코이노니아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 역시 다양성 속에서 코이노니아를 누리기(analogia trinitatis)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끝부분에 있는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는 그의 몸 된 교회에게 복음전파를 부탁하신 것이다. 즉, 교회일체를 위한 주님의 기도 목적은 교회의 복음전파이다. 그리고 골로새서 1:13-20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는 자들의 구속 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와 온 우주를 하나님께 화해시키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대체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영역일 것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 들이나 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 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 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교회의 역사는 교회들의 분열의 역사요 일치추구의 역사이다. 교파들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교리들과 직제들과 사회참여의 방법들이 다르다. 그러나 성경과 전통은 우리들에게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제시한다. 구약의 구속사를 배경으로 하는 신약의 ‘하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통일성에 해당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메시지들이 있고, 이것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교파들의 다양한 전통들이 있으니, 우리는 성경과 전통들 차원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찾아서, 교파들과 교파들의 신학들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이룸으로써, 역사와 창조세계를 하나님께 화해케 하는 과제(골 1:20절과 엡 1:10)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성경에 나타난 에큐메니즘은 아래에서 기술할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의 성경적 근거이다.
3.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인류와 창조세계를 자신에게 화해시키셨으니, 이와 같은 화해의 복음사건 자체가 에큐메니칼 하다. 그리고 요한복음 17:21절에서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과 창조세계를 자신과의 영원한 코이노니아에 초대하심 역시 에큐메니칼 하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이 지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 역시 에큐메니칼 하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역사적 필연성에서 생기기 전에 성경 메시지 그 자체 내에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은 또한 역사적인 필연성에서 생긴 것도 사실(史實)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교회 시대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교구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을 통하여 이단들에 대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단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지중해 세계의 보편교회가 분열될 위기들에 직면했을 때, 공의회들의 교리결정들이 그것을 해결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의 좀 더 근대적인 기원은 19세기 복음주의 각성운동에 힘입은 세계 복음전도에 있었다. 즉, 복음전도의 현장에서 여러 교파들은 상호 간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고, 교파에 대한 정체성보다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협력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라투렛(Scott Latourette) 교회사 교수는 1817-1914년까지의 유럽과 북미의 역사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19세기에 개신교의 복음 선교가 절정에 도달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에 선교의 현장에서 교파들의 협력이 요청되었고, 교파를 초월하는 ‘복음’ 전파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1910년 세계선교 대회(WMC)의 폐막식에서 필리핀의 선교사로서 미국의 성공회 주교인 브렌트가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운동을 제안하여, 이 운동은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신앙과 직제’ 운동이 등장하였고, 1914년 세계 제1차 대전 직전에 스웨덴의 루터교 주교인 죄더불럼이 “평화에의 호소문”을 전쟁 당사국들의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 교회에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1910년 ‘세계선교 대회’(WMC)가 1921년엔 ‘국제선교 협의회’(IMC)로, 그리고 1960년대에는 WCC에 가담하면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 위원회’(CWME)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리하여 ‘신앙과 직제’, ‘삶과 봉사’, 그리고 ‘세계 선교와 복음전도 운동’이 향후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을 결정하였다. 그런즉, 결국 WCC를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된 흐름은 셋인데, 이는 요한복음 17: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을 믿게 하옵소서)과 골로새서 1: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과 에베소서 1: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 나오는 성경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즉,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상과 같이 3흐름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고 1920년엔 동방정교회가 “국제연합”(The League of Nations)에 맞먹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koinonia ton ecclesion)를 제안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죄더불럼과 올드헴 역시 교회들의 연합체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에 스톡홀름에서 제1차 삶과 봉사 운동 세계대회가, 그리고 1927년에 로잔에서 제1차 신앙과 직제세계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 두 대회의 대표들이 결국 1937년 케버트(McCrea Cavert)가 제안한 ‘WCC’(세계교회협의회)란 용어를 받아들여, 네덜란드의 유트레히트에서 WCC헌장이 작성되었다. 그 교리헌장(the Basis)은 성육신 교리와 칼세돈의 정통 그리스도론을 배경으로 하였고, 1961년 뉴델리 WCC 때에는 성공회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첨부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세계교회협의회란 성경을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일체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공동 소명을 함께 성취하려고 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그리고 하라레 WCC 보고서는 WCC의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였다.
WCC 안에서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의 주된 목적은 서로가 서로를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만찬적 친교에 있어서 가시적 일치에 이르게 해야 하고,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배와 삶으로, 나아가서 세상에 대한 증언과 섬김을 통하여 표현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이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일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교회들은 신앙과 삶, 증언과 섬김으로 코이노니아를 추구함에 있어서 WCC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할 것이다.
- 상호간의 책임지기의 정신으로 용서와 화해, 신학적 대화를 통한 좀 더 심오한 관계의 발전, 그리고 상호 간에 인간적이고 영적이며 물질적인 자원을 함께 나누기를 기도 가운데 증진할 것이다.
- 각 장소와 모든 장소들에서 공동증언을 촉진하고 선교와 복음전도 사역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지지할 것이다.
- 인간의 필요를 채우고 사람들 사이의 장벽들을 허물며 정의와 평화 가운데 하나의 인류가족을 진척시키고 창조세계의 보전을 지속시킴으로써 섬김(diakonia)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표현하여,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생명과 삶의 충만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 교육과정을 통하여 에큐메니칼 의식을 고취시키고 각각의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 안에서의 생명과 삶에 대한 비전을 키워나갈 것이다.
-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에서 그리고 타 신앙공동체들에 속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도울 것이다.
- 일치, 예배, 선교와 섬김에 있어서 갱신과 성장을 도모할 것이다.
4. 협의회, 협의회적 친교, 그리고 협의회성
WCC란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이니셜로서 우리말로는 ‘세계교회 협의회’라고 번역된다. 협의회의 기원은 사도행전 15:1-35절의 예루살렘 사도들의 협의회에 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제기된 문제, 곧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할례를 비롯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문제를 안디옥 교회 자체 내에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져와, 사도들 회의에서 해결하였고, 그 결과물(편지)을 안디옥으로 발송하였다. 이것을 효시로 하여, 고대 교회는 일곱 공의회를 열어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세돈 공의회 등이 그 예라 하겠다. 그런데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라 불렀으니, 결국 고대교회역사 속에서 일곱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이 열렸다.
그리고 14-15세기경엔, 교회개혁을 위한 ‘공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이 있었다. 이 운동은 파쥬아의 마르실리우스, 윌리엄 옥캄, 장 제르송, 피에르 다이 등에 의하여 주창되었던 바,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 위에 있다고 하는 성경적 근거(마 16:18-20; 행 15; 갈 2:11)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회의는 피사(1409), 콘스탄스(1414-1418) 등에서 열렸고, 특히 교황청의 아비뇽 포로기 동안에 그 힘을 발휘하였다. 비록 그 운동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개혁과 유럽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세계교회 협의회’(WCC) 운동은 바로 이상과 같은 공의회 운동 혹은 협의회 운동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의 교회일치 운동과 교회의 사회참여 운동과 세계선교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교회 협의회’ 산하 모든 운동은 그 성격에 있어서 세계교회들의 협의회적 친교를 통한 협의회 운동인 것이다. 일찍이 1975년 나이로비 WCC는 “교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진정한 협의회적 특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회적 특성을 반사시킨다.”(S. Ⅱ. Ⅱ. 5)고 하여 협의회적 친교”(conciliar fellowship)의 신학적 근거를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으며, 이와 같은 ‘협의회적 친교’를 통하여 ‘진정으로 연합한 지역별 교회들’로 하여금 보편교회를 지향하게 하였다. 나이로비의 주장을 읽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교회를 창설하셨지만, 오늘날 우리는 서로 분리된 다양한 교회들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우리가 다시한번 갈라지지 않은 한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로 사는 것이다. 이 목표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묘사를 교회들에게 숙고하게 하고자 한다. 하나의 교회란 자신들끼리 진정으로 연합한 개 교회들 혹은 지역 교회들의 협의회를 통한 친교로 묘사될 수 있다. 이 협의회를 통한 친교에 있어서 각개교회 혹은 지역교회는 타교회들과의 친교 속에서 완전한 보편성을 소유하고, 동일한 사도적 신앙을 증거하며, 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동일한 교회에 속하였고,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인도된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 ... (S.Ⅱ. Ⅱ. 3)
그리고 WCC는 서울 JPIC(World Convocation on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를 “협의회적 과정”(conciliar process)으로 보고, 그것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WCC 회원교회들로 하여금 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에 대한 상호 참여(=언약)의 한 협의회적 과정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WCC 프로그램들 가운데 우선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CWC(Christian World Communions)의 연합운동을 통해서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협의회성’(conciliarity)을 잘 알 수 있다
Ⅱ. WCC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오해
1. WCC는 성경을 어떻게 받아드리는가?
구약의 구속사를 배경으로 하는 하나의 사도적 복음(the Gospel Tradition)은 성경과 교회전통들의 원천과 통일성이다(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1963). 1927년 제1차 로잔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는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항상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인 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성령은 온 인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셨고, 무엇보다 구약 안에 주어진 그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오심을 준비하셨는데, 때가 차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성육하사 인간이 되신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과 가르침, 그의 회개에로의 부름, 그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선포, 그의 고난과 죽음, 그의 부활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로의 승귀, 및 그의 성령의 파송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셨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충만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보이신 완전한 사랑에 호소하시어 우리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에로 부르신다(Ⅱ. 9-11).
이상과 같은 ‘복음’은 세상을 위한 “구속의 기쁜 메시지”로서 성경의 중심 메시지이다. 이 “복음”은 인간을 “신앙”에로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이 없으신 사랑으로서 정통 기독론적기고 정통 삼위일체론적인 틀 안에서 주어졌다. 바로 이 “복음”을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롭다함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가 다름 아닌 ‘교회’ 공동체이다.
그런 즉, 신구약성경에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1978년 벵갈 문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성서는 두 개의 책 묶음 속에서 하나의 주제에 의해 함께 모아진 다양한 많은 책들의 모음집이다. 우리는 그것들 속에서 전 창조세계와 민족들과 개개인의 삶을 다루고 계시는 하나이며 동일하신 하나님을 만난다. 구약과 신약의 다양한 증언들 안에서 통일성을 만드는 분은 바로 그 분이시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특별히 하나의 특정 민족을 다루시며 그 민족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다루시는 그분을 만난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그의 가장 충만하고 결정적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그분을 본질적으로 만난다. 성서의 이 하나님은 세계를 보전하고 그가 그것을 위해 세우신 계획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인간존재를 자신의 파트너로 원하시는 분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라고 말씀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104-105)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1983)에 따르면, 이상과 같은 ‘복음’(the Gospel Tradition)을 중심으로 하는 혹은 그것을 통일성으로 하는 성경은 ‘복음’에 대한 증언들로서 영감 된 말씀들이다. 그리하여 성경에는 다양한 메시지들이 있다.
성경을 형성하기 위하여 함께 묶여진 책들은 역사의 과정 전체를 통하여 심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문학적 통일체( a literary unity)를 이루었다. 어떤 저작들은 포함되고 여타의 저작들은 제외된 사실은 교회역사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정경은 다양한 증언들을 모아 놓았고 석의의 역사를 결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다양성이었다.(84)
그러나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각각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은 신약의 특수성을 6가지로 본다. 첫째로
신약성서의 특수성은 구약을 능가하는 한에 있어서 주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그분의 모습에서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자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그의 동반자로 삼기 위함이다. (108)
둘째로 “말씀 그 자체가 육체가 된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와는 비교될 수 없는 친숙한 방법으로 자신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속에 자신을 관여시키셨다.”(108) 셋째로
그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그의 독특한 희생적 삶과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고, 모든 인간이 용서받은 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러 놓으셨다. 그런즉, 구약의 제사법과 규례들은 그것의 적합성을 상실하였다.(108)
넷째는 ‘부활’을 통하여 계시되고 약속된 미래 지향적인 초역사적 정의와 평화의 샬롬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인간 개인의 삶과 우주적인 역사의 궁극적인 운명이 명시되어졌다. 삶과 역사가 이 세상의 한계 안에서 완성될 수 없으며,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 너머에 있는 삶이고, 역사의 최종적 목표가 모든 것의 존재하는 가능성들을 넘어선 세계의 전체적인 변형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그것에 의해서 죽음의 최종성에 대한 구약의 믿음과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들을 다루시는 경세가 죽음 이편의 삶으로 제한된다고 하는 구약의 믿음이 대치되고 무효화되었다. 그리고 완전한 평화와 정의의 세계에 대한 구약의 희망은 변화되어져서, 그것의 완성은 역사를 넘어서고 있다. (108-19)
다섯째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파송된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은바 됨에 따라, 향후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새롭고 보편적인 차원을 획득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 혹은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합체시키시고, 이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을 세계적인 공동체로서 교회로 삼으시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성서가 살아있게 하신다. “따라서 구약성서 안에서 한 특정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있는 관심은 모든 세계에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인간들 사이의 사랑과 정의가 더 이상 한 민족 안에 제한되어지지 않고, 거룩한 전쟁이나 정복한 적들을 진멸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거부되어 진다.”(109)
여섯째로 “구약성서를 능가하는 신약성서 속의 많은 것들이 미미 구약성서 안에서 발견된다.”
둘째로 ?... 성경의 권위와 해석?은 구약의 특징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신약을 능가하는 구약의 특수성에 다름 아닌데,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시요,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시는 심판자라고 하는 것을 구약으로부터 알게 된다.”(112) 둘째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위엄과 은폐성이 강조되어 있고, 세계정치에 대한 관심과 질투하심이라 불리는 그의 피조물들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이 강조되어 있다.” 셋째로 구약은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이들이 우주 안에서 하나의 관리인으로 자리 매김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더 큰 관심들이 나타나 있고, 우상숭배 유혹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고 있으며, ...“. 넷째로 개인도덕과 개인주의적 윤리가 아니라 구조 악과 구조적인 변혁에 대한 요구들이 있으니, “사회의 구조들에 대한 관심, 정의에 대한 요구, 빈곤과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 하나님에 의해 버려짐에 대한 슬픔과 불평에 대한 관심, 그리고 매일의 삶을 위해 지혜를 부여하는 신앙의 중요성, ...”. 다섯째로 신약은 개인주의적이고 수직적이며 영적인 반면 구약은 공동체적이고 수평적이며 현세적이라고 한다. 즉,
그러나 그것들(네 번째에서 언급된 구약의 특수성들)은 신약성서가 그리스도의 계시와 신앙의 철저 화, 그것과 부합되는 삶의 개인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 보다 덜 분명하게 주목을 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구약의 요소들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무시될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의 맥락을 잘못 해석하게 된다. ... 그런즉, 우리는 개인주의적이고 내향적이며 이상적인 틀 안에 갇힐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약이 그것의 목적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세계적 차원에서 윤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보다 구약성서의 넓이와 깊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113)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1983, 제2판)은 아래에서 이와 같은 복음의 증언들로서 성서의 영감을 3가지로 지적할 때, “성경의 내용 그 자체가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이 영감이다”라고 본다. 이는 적어도 이상의 3문서들에서 소개된 방식의 해석에 따른 성서의 내용이지만 말이다.
1. 성서는 파생적이지 않으며(non-derivative) 원형적인(archetypal)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격상 독특하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어느 한 구릅이 구약성경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독특한 것이며, 따라서 동양종교로부터 파생되어 질 수 없다고 하였다. ...
2.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서는 거듭 반복해서 신앙의 원천으로서 입증되어 졌다. 이러한 이유로 성서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것의 주장에 대해 복종해야 함을 주장할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
3. ... 연구보고서들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성서의 내용 그 자체가 권위 있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하며,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위한 그 어떤 외부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을 포기하는 데에 동의한다. 권위는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86-87)
다시 말하면 본 저서는 영감론에서 출발하여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들을 감화시키는 성경의 메시지를 중요시한다. 적어도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사도들의 복음전승과 그것에 대한 증언들일 것이다. 아래의 인용을 읽어 보자.
만약에 확실하게 성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주장이 사람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체험되어 진다면, 성경 뒤에는 하나님 자신, 즉 성령의 활동하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에게 나타내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가 아닌가? ... (87-88)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등 성경해석자들은 결국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 내용으로 우리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성서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해석이 성경이 성령의 저작물로 알도록 인도할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영향을 준 영감 받은 증인들의 긴 연속선을 기억해야만 한다. 첫 번째 증인들은 성령에 의해서 부름 받고 감화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의 마지막 최종 형태가 부여된 후, 성경해석자들의 증거는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다. 마치 성령께서 예전에 그의 증인들을 부르셨듯이, 그분이 우리에게 이러한 필요불가결한 증거들을 나타내게 될 때 그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신앙과 순종과 증거를 일깨우실 것이다. 성령은 교회 안에 살아계신다. ... (88-89)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의 통일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과 아울러 그것의 다양성 그리고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계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경으로서의 성경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즉, 우리는 본문비평과 역사 비평적 방법을 통한 다양한 석의에 의하여 본문의 다양한 의미를 찾아내면서 ‘복음 전승’(the Gospel Tradition)에서 통일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에 비추어 볼 때, WCC가 성서를 타종교들의 경전과 동격(同格)과 동가(同價)로 여긴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2.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그리고 재림을 거부하는가?
WCC는 첫째로 ‘성령잉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본 신조는 신약성경의 증언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확인한다. ... (121)
... 본 신조는 마리아의 모성을 지적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 한 어머니에 의하여 태어나시고 사랑받으시며 양친의 돌봐주심으로 양육을 받으시면서 우리 인간의 경험을 함께 나누신 분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 (122)
본 신조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주장함으로써 시간 속에서 탄생하신 마리아의 아들의 아버지이야 말로 영원한 차원에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께로 태어나신’ 영원하신 아들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신앙을 표현한다. (124)
둘째로 ‘부활’에 대하여 WCC는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죽음의 세력 안에 머물러 계시지 아니하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다고 하는 시실을 믿고 있다. 이들은 부활이 없었으면 “우리의 전파(설교)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니”(고전 15:13-14)라고 하는 의미만큼 부활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및 이 고백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는 성령의 성물을 교회의 삶과 정체성의 기초로, 전 세계를 위한 소망의 근거로, 그리고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으로 고백하고 있다.(176)
셋째로 ‘재림’에 대하여 WCC는 다음과 같이 희망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이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가진 승리자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들에게 삶의 변화를 허락하사, 약속된 안식의 날이 종국적으로 수립될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자들이야 말로 창조와 구속의 기쁨을 함께 나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186)
3.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가?
이것에 대하여는 WCC의 ‘기독론’(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시고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논의)을 살펴보아야 한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본 신조는 아들이 시간 차원이 아니라 영원한 차원에서 아버지께로부터 기원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충만히 현존하지 않으실 것이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로서 시간 속에서 태어나신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를 매개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셨다’(begotten)고 하는 것은 시편 2:7절이 인용되어 있는 누가복음 3:22절과 히브리서 1:5절로부터 온 이미지이고, 이와 동일한 사상이 특별히 요한복음(예: 1:4, 18절과 3:16)에서 발견되는 ‘독특하게 태어나심’(only begotten) - 이것은 실제로 ‘유일무이한 분’이라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 이라는 용어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태어나심’이란 말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본성적(connatural) 관계를 표현하고, 아버지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아들 낳으심은 어떤 특정 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하는 말이다. ... (115)
신약성경에 의하면, 만물이 아들을 통하여 창조되었다(골 1:16; 히 1:2). 이것은 세상을 탕조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과 일치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또한 세상 창조에 참여하신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아들을 창조자라는 말로 인식하는바, 이 아들을 세계창조의 중보자(창 1:3 이하; 요 1:3)로 표현하였다. ... 모든 창조는 태초부터 아들 안에서 완성(엡 1:10)되도록 설계되었다. 아버지의 세계창조의 사랑은 이미 역사의 절정에서 일어날 영원한 아들의 성육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각 피조물이 각각 특별한 모양으로 마땅히 되어야 할 바를 요약해 주시는 바, 모든 창조세계의 영원한 모형인 로고스이시다. 그 어떤 피조물도 이 로고스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보면, 아들의 성육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완전히 명백해 진다.(119)
이상과 같은 기독론에 비추어 볼 때, “석가 그리스도, 공자 그리스도, 모택동 그리스도, 아프리카의 정령신앙 속에 있는 정령 그리스도” 등과 같은 비난과 비판은 언어도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질로 초월적인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을 지니신 분으로서 ‘하나님’에 다름 아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의 성육신을 통한 ‘내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사, 말구유에 나시며 성령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으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성령으로 갈릴리 사역을 수행하셨으며, 성령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성령으로 부활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심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분이시다. 또한 그는 창조의 로고스요 창조세계 속에 내주하시는 로고스로서 모든 것을 완성해 가신다. 물론, 그분은 이스라엘의 메시아시오 열방의 구세주로서 구속의 사역을 이룩하신 유일무이한 분이시다.
4. WCC의 교리헌장(the Basis)은 신앙고백들 및 신학의 다양성과 충돌하는가?
WCC는 교파로 말하면 340개가 넘고, 교인들 숫자로 보면 5억이 넘는 세계교회들의 에큐메니칼 가족으로서 정통 기독론(451년 칼케돈)과 정통 삼위일체론(381년 네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을 배경으로 하는 ‘교리헌장’(the Basis)을 공통분모로 하여, 코이노니아와 증언과 섬김을 위하여 다양한 신앙고백들과 다양한 신학들을 추구 한다.
세계교회협의회란 성경을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일체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공동 소명을 함께 성취하려고 하는 교회들의 코이노니아이다.
2006년 포르트 알레그로의 WCC의 목적과 기능에서 WCC에 가입하고자 하는 교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증언”이 다음과 같은 WCC의 “규범들과 실천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규범들과 실천들”은 아래와 같다.
1. 교회들은 삶과 증언에 있어서 성경에 따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이 신앙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
2. 교회는 복음을 설교하고 복음의 가르침에 의하여 이해된 대로의 성례전들을 추구하는 사역(a ministry)을 유지한다.
3.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다른 교회들의 세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4. 교회는 자신의 영역 밖에서의 그리스도와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인정하고 타 교회들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는다고 하는 깨달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도한다.
5. 교회는 WCC의 다른 회원교회들 안에서 참 교회의 요소들을 인정한다. 비록 교회가 타 교회들을, “참되고 충만한 교회”로 인정을 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교리헌장’과 ‘WCC의 목적과 기능’에서 WCC 회원교회들이 공유해야 하는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을 발견한다. 적어도 WCC는 ‘신앙과 직제’ 전통의 다음과 같은 공식문서들에 나타난 ‘신앙’에 헌신하고 있다 하겠다. 즉, 1. ‘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몬트리올 ‘신앙과 직제’ 제4차 세계대회: 제2분과)(1963) 2.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Text(1982). 3. Confessing the one Faith: An Ecumenical Explication of the Apostolic Faith as it is Confessed in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381)(1991), 4. The Church: Towards A Common Vision(2012)이 그것이다. 하지만 WCC는 이상과 같은 모든 WCC 회원교회들이 공유해야 할 신앙고백과 신학을 에큐메니칼 운동의 길잡이요 반성의 전거로 보면서도 회원교회들의 다양한 신앙고백들과 신학들을 무시하지 안 는다. WCC는 모든 회원교파들의 신앙고백들과 신학들의 해체가 아니라 위에서 제시한 WCC의 신앙과 신학에 준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을 검토하고 비판하고 수정 보완할 것을 수정 보완하기를 바랄 것이다. 신앙과 직제의 헌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라고 선언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신학적인 요소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을 ‘신앙과 직제’운동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호주의 연합하는 교회’, ‘캐나다의 연합교회’, 그리고 ‘남인도 연합교회’ 등은 각각 연합의 조건과 결과로 작성된 연합신앙고백(union confessions)을 매우 충실하게 따르면서 WCC의 신앙과 신학을 추구한다.
5. 정현경은 성령을 거부하였는가?
1991년 캔버라 WCC의 전체 주제는 “성령이여 오소서, 전 창조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소서”였다. 성령초대의 기도로써 전 창조세계의 갱신을 기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부주제들도 성령으로 시작한다. 제1분과는 ‘생명의 부여자이시여, 당신의 창조세계를 지탱하소서!’였고, 제2분과는 ‘진리의 영이시여, 우리를 자유케 하소서!’였으며, 제3분과는 ‘일치의 영이시여, 당신의 백성을 화해시키소서!’였고, 제4분과는 ‘성령이시여, 우리를 개변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소서!’였다. 캔버라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적인 성령론에 바탕 하여 성령의 만유현존을 주장하였다.(S. Ⅰ. Ⅰ. A. 1)( S.Ⅰ. Ⅰ. A. 2)
그런데 위와 같이 성령을 전체 주제와 소주제들로 내세운 캔버라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주제에 대한 ‘기조연설’(keynote speech)을 하게 하였다. 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와 범 아프리카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인 파르테니오스(Parthenios)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정현경 박사였다. 그런데 정교회 사람은 정통 삼위일체론과 정통 기독론과 정통 성령론을 주장하였다.
WCC 총회들의 주제들은 그 동안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왔다. 그러나 호주 대륙에서 모이는 이번 총회에서 우리는 이번 대회의 주제가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 위격이신 성령이 될 것을 결의하였다.(S. Ⅱ. 2)
즉, 파르테니오스는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경세적 하나님께로 하향하는 삼위체론에 입각한 성령론을 주장한 것이다. 특히, 본 총회에서는 성령의 관계적 독립성 그리고 ‘영 그리스도론’이 부각되면서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지배적 이었다. ‘영 그리스도론’이란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사, 말구유에 나시며 성령으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으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으며, 성령으로 갈릴리 사역을 수행하셨고, 성령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성령으로 부활하신 분이시라고 하여, 창조와 역사에 보편적으로 현존하시고 사역하시는 창조자 하나님의 영(루아흐 야훼)이 이처럼 예수님의 모든 지상사역들에 선행하셨고, 동행하셨으며, 오늘날 창조와 역사 속에도 보편적으로 현존하시고 사역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오순절에 파송해 주신 기독론적 성령론(서방교회의 성령론)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현경은 ‘해방신학’, ‘민중 신학’, 그리고 ‘한(恨)의 신학’ 입장에서 혹은 ‘경험의 세계’로부터, 혹은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영 그리스도론’에 입각한 성령론’을 주장하다가, 정통 서방교회의 기독론적 성령론으로부터 너무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초혼 굿의 형식을 빌려서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억압받고 소외되었으며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탄식과 울부짖음을 성령의 목소리와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창 21:15-21)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착취를 당하였고 버림을 받은 이집트의 흑인 여성 하갈의 영혼이여!
... 중략 ...
예수 탄생 시 헤롯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남자 아기들의 영혼이여!
잔 닥과 중세시기 동안 마녀심판으로 화형에 처해진 많은 다른 여성들의 영혼이여!
십자군 전쟁 때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여!
식민주의 시대와 기독교 이방선교 시기 동안에 대량 살상된 토착민들의 영혼들이여!
홀로코스트 동안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영혼들이여!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원폭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 중략 ...
광주와 천안문광장과 리투아니아에서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매일 같이 죽임을 당하는 아마존 우림의 영혼들이여!
인간의 물질과 금전에 대한 탐욕으로 강간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여 착취를 당하는 땅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피비린내 나는 걸프전에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흙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십자가에서 고문을 당하셨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의 맏형 해방자 예수님의 영혼이여!
정현경 박사는 위의 서론에 이어서 3주제를 다루었다. “1. 한(恨)으로 가득 찬 이 영혼들과 함께 하는 성령의 땅에서. 2. 바벨의 영으로부터 오순절의 성령으로. 3. 회개에 대한 부름: 하나의 ‘생명의 정치적 경제’를 향하여”를 다루었는데, 각 주제의 끝 부분에서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과 위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영혼들의 부르짖음을 연결시켰다. 3번째 주제의 끝 부분만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에너지로 우리를 분열시키고 있는 분열의 담들과 ‘죽음의 문화’를 무너트리십시다. 우리는 성령의 생명의 정치적 경제에 동참하여, 모든 생명체들과 연대하여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싸우고 JPIC를 위한 공동체들을 건설하십시다. 성령의 거친 바람이여 우리게 불오 오소서! 우리는 그녀를 영접하여, 그녀의 거친 삶의 리듬에 동참하십시다. 성령이여 오소서! 전 창조세계를 새롭게 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현경 박사의 성령론은 위에서 제시한 삼위일체론의 틀에서 벗어나 있고, 기독론에 정위되어 있지 않으며, 교회론 및 구원론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지 않고, 그리고 종말론과도 무관하여,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하겠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그녀의 성령론의 의도와 목적과 달리, ‘혼합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특히 WCC의 종교간 대화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주장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확실한 것은, WCC가 ‘혼합주의’(syncretism)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WCC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언급한다.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 든 타종교들로부터 취해진 여러 가지 요소들을 자료로 제3의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 위험성인데(나이로비 WCC), 나이로비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좀 더 넓게 본다며(제2부 C. 26), 두 가지 위험성을 덧붙인다. 하나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대화 상대방의 문화적인 셋 팅이나 타종교들과 타 이념들의 개념들과 용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너무 과도하게 나감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삶의 신빙성을 타협해 버리는 위험성이다.” 둘째 위험은 “하나의 살아있는 신앙을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써가 아니라 타 신앙 혹은 이념의 용어로써 해석할 때 생기는 위험부담이다.(제2부 C. 27) 이는 학문성과 대화의 원칙에 근거하여 볼 때 합당하지 않다. 이를 상론하면 아래와 같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 대한 어떤 다른 접근의 한 변형체라고 봄으로써 ‘혼합주의화’ 될 수 있고, 혹은 기독교 이외의 신앙이 기독교인들이 충만한 것으로 알고 있는 자신들의 신앙내용의 부분적인 이해에 불과하다고 할 때 역시 ‘혼합주의화’할 수 있다.(제2부 C. 27)
6.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는가? 모든 종교들 안에 구원이 있는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정과 마을과 같은 로컬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 보전이 요청되는 국가와 나라들과 같은 글로벌 차원에서도 타종교들과 이념들과 문화의 문제들로 대화가 필요한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상호 신뢰와 각 참여자의 정체성의 온전성에 대한 존중에 기초한” 대화를 위하여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이고 둘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제2부 C. 17)고 하는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 문서는 ‘대화’를 통하여 복음이 ‘증언’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진실로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가지고 대화에 들어갈 때, 흔히 대화의 관계에서 신빙성 있는 증언을 위한 기회가 주어진다.”(제2부 C. 18)고 한다. 다시 말하면, 본 문서는 ‘대화’와 ‘증언’을 이원화하지 않고, 대화를 통하여 증언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힌두도인이든 각자가 “상호 신뢰와 각 참여자의 정체성의 온전성에 대한 신뢰”(a mutual trust and a respect of the integrity of each participant's identity)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를 포함하는 모든 종교들이 각각 자신의 특수성과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대화’에 임해야 한다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바아르 성명은 제Ⅰ장 서론에 이어서 제Ⅱ장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 안에 현존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제Ⅲ장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이 포함되었고, 공관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역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을 포함한다고 하는 보편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제Ⅳ장은 성령께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 안에 현존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결국 본 문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유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종교들 안에 실존하시고 계신 것으로 보고 있는 점에서 1980년대까지의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와 ‘기독론적 배타성’을 넘어섰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종교간 대화 지침서’와 마찬가지로 바아르 성명은 종교간 대화의 출발점과 구원론의 원천을 철저히 기독교적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초월적인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역사와 창조 안에 내재하신다고 하는 확신은 타 종교들 자체가 구원의 원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이 구원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논한 기독론(제2항과 제3항)은 ‘불교, 힌두교, 아프리카의 정령신앙 등’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창조세계에게 제공되었다.”(탐바람 Ⅱ) 하지만,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대한 사명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멜보른, 188) 이것은 역설과 긴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구원의 길도 가리킬 수가 없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제약할 수는 없다.”(산 안토니오, Ⅳ. 26)에서 우리는 오직 ‘복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확보하면서도, 복음전도(evangelism)와 타종교들과의 대화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는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긴장에서 타 종교 그 자체가 구원을 제공하거나 그 안에 구원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복음’이 그것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온 인류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성육신) 모든 인류의 죄와 죽음을 한 몸에 걸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역시 그것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삼위일체론도 마찬 가지이다. 즉,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보편적으로 현존하시고 사역하신다고 하는 것 역시 그것의 특수성을 전제하는 보편성이다. 이는 어디 까지나 타 종교들과의 관계에서의 기독교의 자기이해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특수와 보편의 역설로서의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믿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믿지 않는다. 사실은, ‘살아있는 모든 종교들’이 나름대로 각자의 특수성에 근거한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종교적 다원성과 기독교의 자기이해?는 구원이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전통 기독론적이고 정통 삼위일체론적인 ‘복음’(본 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환대에 집중하고 있지만)을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구원이란 하나님,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구원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내 맡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 자신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의 영원한 환대에 다름 아니다.
대체로 WCC의 구원론은 펠라기우스주의를 따르지 않고 2000년에 선포된 로마가톨릭교회 루터교 세계연맹의 ‘칭의 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1999.10.31)에 나타난 주장을 따르고 있다. 2002년엔 세계 감리교 역시 이 문건에 서명 날인하였고, 우리 개혁교회 역시 이에 대하여 전혀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다 하겠다. WCC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2005)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교회란 도덕적 성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음에 의존한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 두 공동체의 분열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던 바, 최근에 이 두 공동체가 자신들을 분열시킨 주 된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혹은 의화교리)의 핵심적인 측면들에 대한 합의에 도달한 것은 교회일치를 위해서 중차대한 일이다. 도덕적인 헌신과 공동의 행동이 가능하고 심지어 교회의 삶과 존재가 지닌 본유적인 것으로 주장될 수 있는 것은 신앙과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Ⅳ.113)
7. WCC는 동성애 자체에 대하여 동의하는 결정을 했는가?
레위기 18:22절, 로마서 1:24-32절, 고전 6:9-10절, 그리고 창세기 18:20-21 및 19;4-5절에 근거하여 근본주의 개신교, 로마가톨릭교회, 그리고 동방정교회뿐만 아니라 침례교회, 루터교, 상당 부분의 장로교회와 감리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추세이고, 캐나다 연합교회와 캐나다 성공회는 이를 관대하게 허용하고, 미국의 그리스도의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hrist in USA) 소속 개 교회들 및 미국장로교회(PCUSA) 소속 개 교회들 가운데 그것을 허용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의 나라들 가운데는 그것을 법제화한 나라들도 있다. 우리는 앞에서 인용한 성경구절들보다도 앞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예스’(고후 1:18-20)로서 ‘복음전승’(the Gospel Tradition)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 즉, 로마서 5장과 고린도후서 12장이 선언하는 보편주의적 화해론과 에베소서 1장과 골로새서 1장과 계시록 21-22장이 고백하는 보편주의적 하나님 나라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이스라엘을 택정하셨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세계를 구원하시며, 결국 창조세계를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사랑하신 것처럼 동성애자도 사랑하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소외되고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동성애 이슈는 히틀러에 의한 5십 만 명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집단 살해와 동성애자들의 안수례를 통한 성직수여로 인하여 ‘공적인 이슈’(public issue)로 부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바, 그것은 ‘인종차별’, ‘여성차별’, ‘장애인 차별’, ‘가나한 자들’, ‘난민들’, ‘이민자들’, 그리고 기타 ‘소외되고 주변 화된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같은 차원에서 동정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던 중, “1983년 제6차 WCC 총회가 비로소 동성애 사람들을 위래서 도처에 있는 교회들의 목양적 책임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교회들로 하여금 동성애 문제를 교회들 스스로 그리고 교회들 상호간에 검토하고 연구하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로 “WCC 산하 교육 분과는 동성애에 관한 교회들의 공식적인 성명들과 성윤리에 대한 여러 다른 자료들을 수집하게 하였고, 하나의 연구지침서를 마련하여 교회들로 하여금 성과 인간관계에 관련된 교육과 목양적 돌봄과 변호 프로그램들을 만들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향후 ‘동성애’ 이슈가 교회 분열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는 한, 교회들의 가지적 일치를 추구하는 WCC는 그것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내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곧 온 인류와 창조세계 전체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교회들이 인구의 10%나 되는 저들은 물론, 기타 소외되고 주변 화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주변 화시키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8. WCC는 공산주의를 추구하는가?
1937년 옥스퍼드 ‘삶과 봉사’ 세계대회는 모든 정치형태와 경제이념들을 초월하는 교회의 인류사회에 대한 책임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암스텔담 제1차 WCC 총회 역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를 비판하고 넘어서는 예언자적인 사회윤리의 입장 혹은 초월적이면서도 참여적인 사회윤리의 입장을 보였으니, 향후 WCC는 정치적 형태와 경제적 이념들을 넘어서서 JPSS와 JPIC 등 복음이 요청하고 불신자들도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 중간 공리들에 입각한 사회윤리의 실현을 추구해 왔다. 암스텔담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모두를 거부해야만하고, 또 이러한 극단적 형태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인간을 벗어나게 해야한다. 이 둘 모두는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을 해 왔다.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는 경제정의를 강조하며 혁명이 완수된 후에는 자유가 자동적으로 올 것이라고 약속한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자유를 강조하면서 정의는 자유기업의 부산물로서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것 역시 그 거짓이 들어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리하여 정의와 자유가 다른 한편을 파괴하지 못하게 하는 새롭고도 창의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임일 것이다.
그리하여 제Ⅲ분과에 의한즉, 암스테르담은 자본주의 나라이든, 공산주의 나라이든, 이 나라 안에 있는 국민과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촉구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세상에 참여하면서도 세상에 대하여 초월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이미 지적한 옥스퍼드 (1937)의 긴장을 계속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암스테르담의 입장이 1980년대 말 공산권의 붕괴에 의하여 돋보이는 동시에, 오늘 날 시장 경제 원리에 의하여 지구촌을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고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20세기 말의 현대인들의 모습을 반성케 한다 하겠다.
따라서 WCC는 결코 ‘용공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저들의 비난과 중상모략은, 1990년 이전 ‘냉전구도’ 속에서 보수파 기독교권이 동구권 및 구 소비엣 체제 안의 교회들의 WCC 참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발하면서 시발되었다. 그리고 WCC가 북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 준 경제원조가 그 나라의 게릴라들에게로 흘러들어 갔다고 하는 소문으로 보수파 기독교는 WCC를 더욱 더 ‘용공’으로 매도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한국 보수파 개신교 역시 1990년 이전 ‘냉전구도’ 및 ‘반공이념 체제’하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공’으로 몰았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WCC는 초이념적이면서 현실 참여적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한국 보수파 개신교는 결국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하면서, 오직 ‘북한’을 염두에 둔 ‘반공이념에만 사로 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보수파 개신교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터진지 9일 만에 열린 1950년 토론토 WCC 중앙 위원회의 결정을 알지 못한다.
WCC는 1949년에서 1954년 까지 여러 신학협의회들을 통하여 이데올로기적 양극화를 비판하였고, 교회들로 하여금 냉전체제를 반대할 것을 촉구하였다. 예컨대, 1949년 방콕에서 열린 WCC와 동 아시아 NCC들로 구성된 협의회는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혁명“과 ”정의를 말살시키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구별하는 보고서를 내놓았고, 1949년 CCIA(the 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the International Affairs)는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이것으로 인한 국제적 긴장”을 협의회의 제목으로 삼았다. 히로시마 이후 WCC의 주된 관심은 “군비축소”였고, 1949년 CCIA는 “수소폭탄에 대한 국제적 제어기구”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이 터진지 9일 만에 토론토에서 열린 WCC중앙 위원회는 “우리는 정의를 확장하고, 싸우고 있는 양대 세력의 화해를 시도함으로써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세계질서의 도구인 UN 으로 하여금 police action(국제평화질서 유지를 위한 국지적 군사행동)을 통하여 한국에 관여할 것을 공인하였다.” 그리고 WCC실행 위원회는 1951년 세계의 정치적 갈등 이면에는 심오한 경제문제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WCC의 태도와 행동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 중공은 WCC를 탈퇴하여, 향후 40년 동안 WCC와 별거해야만 했다(1991년 캔버라에서 다시 WCC 에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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