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9. 삶과 문화 : 소명과 자유] ④ 기독교인의 삶 : 삶이란

꾸벅준혁 2017. 9. 22. 13:53
복음으로 ‘자유’를 얻는 기독인의 삶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실제로 삶이 달라진다. 동일한 사람이 인생관에 따라 다른 삶을 산다. 기독교인이 되면 ‘신앙’을 가진다. 신앙의 관점에 따라 삶을 해석하고, 그때부터 새롭게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은 성경이 삶을 어떻게 보는지, 또 신앙은 삶과 연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려 한다. 성경에는 감사, 긍정, 축복, 은총 등 삶을 보는 관점이 많다. 오늘은 그중에 세 가지만 보겠고, 이를 통해 성경의 인생관을 간단히 조망하려 한다. 

자유 

삶은 고행이 아니다. 기독교는 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니다. 신앙생활이 의무로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신앙이 얼마의 ‘윤리적 조항’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경 읽기, 교회 봉사, 교회 출석, 십일조, 기도 등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요소들이다. 하지만 이 요소들에 담긴 ‘복음’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 조항을 의무적으로 요구하면 그 순간 신앙의 요소들이 ‘윤리적 조항’이 된다. 

교회가 ‘윤리적 조항’을 앞세우면 윤리적 조항을 잘 지켰는지에 따라 신앙을 판단한다. 윤리적 조항을 앞세우면 신앙은 경직된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은 고행이 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굴레가 된다. 

물론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윤리적 덕목이 있다. 윤리적 덕목은 복음에 대한 기쁨의 응답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감사로 윤리적 덕목이 행해져야 한다. 그렇기에 윤리적 조항은 복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복음을 뒤따르는 후행적 성격을 가진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 제약이고, 부담이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마 11:28).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놀라운 선포를 했다. 예수님의 첫 선포는 복음의 ‘자유’였다(눅 4:18∼19). 예수님은 의무를 앞세우지 않았다. 언제나 복음이 앞섰다. 복음은 자유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선포는 자유의 선포였다. 

예수님은 세상의 온갖 악독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다. 모든 압박과 질곡을 떠나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자유다. 기독교인에게 삶은 불안과 좌절, 소외와 허무의 힘으로부터의 자유, 근원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현재 

삶에서 ‘현재’는 중요하다. 기독교는 부활을 소망하고 내세를 믿는 종교다. 기독교는 어느 종교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의미를 둔다. 기독교가 ‘미래’에 강한 지향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은 현재의 삶을 과소평가하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예수님은 현재적으로 구원을 선포했고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했으며 현재의 시간 안에서 자신을 따를 것을 요청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우리를 만난다. 

기독교 일각에서 현재의 삶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말하거나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주장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내세를 강조하면서 현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성경의 뜻이 아니다. 이런 해석은 현재의 삶에 대해 허무주의나 순응주의적 태도를 만든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현재의 삶에 대한 과소평가다. 마르크스(K Marx)는 기독교의 신앙이 아편과 같다고 비판했다. 기독교가 현재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를 외면하고 저 세상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비판은 기독교가 얼마나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인식하지 못한 오해에 기인한다. 

기독교는 현재의 삶을 귀하게 보는 종교다. 현재는 미래만큼이나 중요하다. 미래와 현재가 함께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성경은 내세의 축복을 구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소망이 현재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든다. 즉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현재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구조다. 

삶, 그 자체! 

삶(life)은 하나님이 주신 생(life)이다. 삶 자체가 의미가 있다. 삶에서 대단한 것을 성취해야 그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어떤 것이 추가되지 않아도 삶 자체가 귀하다. 각 사회는 다양한 기준에 따라 삶을 평가한다. 경제력, 사회적 성취, 외모, 학력 등으로 인간의 삶을 판단한다. 하지만 성경은 아무런 수식이 없는 ‘삶 자체’를 귀하게 본다. 삶이 귀한 것은 모든 삶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한 인간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겼다. 생명 자체가 귀하기 때문이다. 세리와 창기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달라졌다. 그들은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삶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 그 호흡 자체가 가치 있다. 내 삶을 귀하게 볼 수 있을 때 이웃의 삶도 사랑할 수 있다(마 22:39). 

삶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조금 구체적으로 보자. ‘삶의 의미’는 특정한 분야나 특정한 행위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삶에 속한 모든 행위가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삶에 포함된 것, 즉 축구, 등산, 다양한 학문, 음악, 미술, 정원 가꾸기, 산책 등이 다 귀하다.

요리를 배우고 싶은데 80세라는 나이 때문에 망설인다면 당장 시작하기를 권한다. 여러분, 80세에 요리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으려는가? 그 질문은 자본주의식 경영과 효용성의 관점에서 나온 질문이다. 요즘은 뭐를 하든지, 그것을 통해 어떤 결과를 얻고 이득이 발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사고방식은 삶 자체가 귀하다는 성경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요리를 배우는 것, 그 자체가 귀하다. 그것이 삶이다! 

성경은 효용성, 성취, 결과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삶 속에서 배우고 체험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이다. 삶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삶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독자 여러분, 모두들 삶 속에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662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