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조직신학

[평신도를 위한 알기쉬운 신학강좌-9. 삶과 문화 : 소명과 자유] ③ 기독교와 세상

꾸벅준혁 2017. 9. 22. 13:53
기독인 사회책임은 ‘은혜에 대한 응답’ 

기독교가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지, 혹은 개인 구원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한국교회에서 오래된 주제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활동이 종교적 영역에 국한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적 영역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이라는 해묵은 용어를 떠나 이 주제에 대해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자. 기독교는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 오늘 강좌의 주제다. 

세상을 향한 책임성 

바르트(K.Barth)는 교회를 삼중적인 화해의 역사로 보았다. 바르트가 말한 교회의 삼중적 성격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소명’,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육’, 세상을 향한 ‘파송’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모이는 교회, 훈련받는 교회,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라는 세 가지 성격이 조화를 이룰 때 건전한 모습이 된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삼중적 화해’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삼중적 요소가 분리되거나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문제가 생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삼중적 요소 중에서 ‘흩어지는 교회’에 해당된다. 이 부분만 강조해서도 안 되지만 이 부분을 소홀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기독교인의 책임성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기독교인의 세상에 대한 책임성은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 책임성으로 나타난다. 은혜는 하나님 임재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체험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성경은 이 만남을 ‘은혜’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은 감격과 감사로 나타난다. 하지만 ‘감사’가 입으로 외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감사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뜻을 보자. 성경에는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증언에서 시작한다. 이 세상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피조물이다. 또 하나님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해서 친히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셨다. 하나님이 모순과 부조리가 넘치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사랑의 극치다. 십자가를 떠나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세상에 대한 책임성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도의 실현이며, 교회의 파송에 해당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외에 어떤 다른 세상도 주지 않았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세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렇게 사랑하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성을 가진다.

책임성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하나님이 만든 피조세계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성은 무한한 것이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몇 가지 주제를 보자. 

1)평화를 위한 책임.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평화의 세계다.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왕국은 평화의 나라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평화의 나라를 멋지게 표현했다(사11:6∼9).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화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원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심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사건이다. 교회는 전쟁, 폭력, 인간성의 파괴, 인격이 왜곡되는 어떠한 행위도 극복해 나가야 할 평화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2)사랑을 위한 책임.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사랑의 메시지는 성경의 중심을 이룬다. 예수님은 이웃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하기를 가르쳤다(막12:31). 기독교의 특징은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 집약된다. 우리는 갈등과 분쟁의 시대에 산다. 증오는 증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가져온다. 증오와 복수심을 끊어버리는 유일한 것이 사랑이다.

3)고통받는 자를 위한 책임. 교회는 고통받는 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언제나 고통받고 소외된 자에게 관심을 둔다. 고통받는 자에 대한 책임은 구약에서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는 가르침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고통받고 어려움 속에 있는 자와 함께했다. 예수님 주변에는 그 사회에서 버림받은 가난한 자, 세리, 창기, 병자가 수두룩했다.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외면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다. 

4)역사를 위한 책임.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다. 자기 혼자서 ‘예수 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역사를 떠나서 임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세상과 역사를 찢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고 동참해야 한다. 이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간파할 수 있는 의식이 ‘예언자적 정신’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져야 할 역사 책임적 과제다. 

5)피조세계를 위한 책임. 교회는 피조세계를 위한 책임을 갖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다. 어떤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이나 피조세계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에 어긋난다. 이것이 자연과 피조물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성이다. 피조물에 대한 책임성은 단지 지구의 자연과 환경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주적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에 무관심하라는 것은 모독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이웃을 위해, 이 사회를 위해, 피조세계를 위해 기독교인은 즐겁게 헌신한다. 기독교인은 의무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헌신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소명이고 또한 자유다.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과 함께 죽고 세상과 함께 구원받아야 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세상으로부터(from)의 구원이 아니다. 이 세상과 함께(with)하는 구원이다.

김동건 교수 <영남신대 조직신학, 저자연락은 페이스북 facebook.com/dkkim222>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64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