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력신학의 발전
1. 발전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염두해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가들의 영향은 엄청났고,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호응을 받으면서,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개신교라는 종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개혁신학은 무엇이고 개혁교회란 무엇인가. 이것은 2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광의로 카톨릭 신학, 교회에 대항해서 생겨난 개혁교회 전체를 지칭하고, 좁은 다른 하나의 의미로는 루터를 제외한 칼빈의 영향을 받은 장로교 계통을 개혁교회라 지칭한다. 루터 계통은 자체적으로 불리길 원하며 빠져나갔다. 그리고 개혁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을 의미한다.
본 강의에서는 두 의미를 혼용해서 사용할 것인데 문맥에 따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제 넓은 의미의 개혁교회가 어떤 시기를 거쳐 왔는지 보려고 한다.
1) 종교개혁의 시대1) (1517-1564)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짧지만 중요한 시기이다. 1517년은 상징적인 해로 루터가 공식적으로 논쟁을 시작한 시기이다. 그리고 1564년 5. 27 은 칼빈 임종의 해이다.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자들은 많았다. 이들을 pre-Reformer 라고 부른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풍토를 마련하였다. 보헤미야 계통에서는 얀 후스(Jan hus, 1373-1415),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9경-1384),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존 녹스(John Knox, 1514경-1572), 파렐 등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의견에 옳다라고 동의하며 따르는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6C 급격한 변화가 있었고, 이것은 시대정신과 교회의 선포, 신학 사이의 gap을 만들었다. 카톨릭 교회와 그 신학은 여기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개혁가가 되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한 가지를 고민했다. ‘어떻게 동시대인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을 전하고 매개할 것인가?’그들은 이와 같은 역사책임적 과제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고민은 당시의 좋은 카톨릭교의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가들은 많았고, 다양했으나 그들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종교개혁가들의 삶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참으로 거칠었다.
루터는 창조적이고 굳센 의지, 칼빈은 철저하고 조직신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의 무리들이 종교개혁가들을 알아보고 따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동체가 되었고 이 공동체는 개혁교회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학을 개혁신학이라 불렀다.
2) 개신교 정통주의(개신교 스콜라주의)시대 (1564-1755 : -계몽운동)
일반적으로 정통주의 신학을 따른다고 할 때, 이 시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스콜라주의 시대라 불리기도 한다.
대체로 이 시기는 1세대 종교개혁가들이 죽고 난 이후부터 계몽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약200년이라는 긴 시기였다. 이 시기는 2가지 경향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
(1) 신학의 체계화
이 시기는 창조적이고 활화산 같이 분출해 나온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이 체계화되는 시기이다.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많은 저술이 있었음에도 신학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시기 기독교의 교리적 작업이 행해졌다. 죽음, 인간론.... 웨스터뮌스터 신앙고백(우리 헌법에 실린)도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신학적, 교리적 작업이 일어났기 때문에 정통주의라 불리게 되었다. (20C 신정통주의가 있어서 이 시기를 구정통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는 개혁가들에 의해 답변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신학적으로 답변되었다. 여러 교리들, 교회의 직제, 예정론 등...
(2) 딱딱한 교리로 경직
예정론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좁은 의미의 개혁교회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은 칼빈의 것이 아니라 베짜의 것이다. 베짜의 예정론은 융통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우리가 전해받은 예정론은 베짜의 것보다도 더 융통성이 결여되어 있다. 칼빈은 이중예정까지 그의 예정론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이중예정은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가 정해져 있고, 구원받을 수까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칼바르트가 예정론을 새롭게 정리했다.) 이 시기 신학적으로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경직되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 신학적 정비, 교리의 체계화,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개혁가들의 원래 정신, 의지, 열정들은 사라지고, 교리적으로 굳어졌다. 그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지 못하고 단순 반복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칼빈, 루터의 시대와 시대적 정황이 달랐다. 그러기에 그 시대에 합당한 재해석과 신학적 작업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개혁가들이 원래 원했던 신학적 능동성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개혁가들이 그토록 진정 원했던 것은 신학적인 능동성을 가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개혁가들의 원래의 정신이 퇴색되어 버린 것이다.
개신교 정통주의로 굳어지면서 그 시대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것은 계몽주의 운동으로 인한 자유주의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현상을 배태했다.
어느 시대에나 문제가 있고, 그렇게 되면 문제제기가 계속된다. 그리고 연속된 문제제기는 movement 로 나타난다.2) 그러다가 어느 한 시점이 되면 폭발적이 되거나 하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종교개혁때처럼 말이다. 수면 속의 문제제기들이 양성화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하나의 개혁교회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뒤따르는 것이 신학적으로 체계화 하는 것이다. 이 체계화가 200년을 끌었다. 체계화를 해야 하는 이유는 연속성의 문제이다. 사상과 정신을 다음세대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체계화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체계화를 하면서 동시에 그것(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속 견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이 시기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체계화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개하고자 했던 개혁가들의 원래 정신을 견지하지 못하고 상실했던 것이다. 남은 것은 화석화된 신학 뿐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가들이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가톨릭의 신학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재해석 과정에서 새 시대를 매개할 수 있는 새로운 고민과 신학적 작업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또 다시 문제제기들이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개신교 내에서 일어난다. 한편 가톨릭은 놀라운 신학적 작업을 한다.
3) 위기의 시대 (1755-1914 : - 1차대전) : 계몽운동과 그 여파
이미 상당히 굳어지고 있던 개신교 정통주의에 반발하는 흐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유럽의 기독교회는 다시한번 격렬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역사적으로 가장 큰 변화의 시기로 꼽히는 계몽운동의 시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계몽운동은 기독교로서는 위기의 시대이나 일반역사에서는 영광의 시대이다. 이 시대부터는 사고의 패턴이 달라지고, 근대화가 일어난다. 여기서부터 현대신학이 발흥될 토양이 만들어졌다. 거의 모든 영역들이 발전하고 변화한다. 일반 사회, 과학, 경제, 문화, 시대정신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루터의 시대보다 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였다. 과학은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고, 다양한 분과가 생겨났다. 신학 또한 다양한 분과가 생겼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철학에서 다루어지던 역사학이 분과하여 발전하면서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부터 역사적 고증을 거치지 않은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역사적 사료가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교는 성경에도 적용되어 역사비평학이 등장하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과학적 발명은 사회, 문화 등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사고를 전화케 했다. 방적기, 증기의 발견, 기차의 발명 등. 이전까지의 운송수단은 걷거나 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중교통이 등장하고 기차가 발명된 것이다. (농촌사회, 씨족사회에서는 고향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다. 중세를 이해하고 싶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라고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다. ) 고향을 벗어날 수 없던 사람들에게 기차의 발명은 삶을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전업주부로만 머물던 여자들에게도 숙련된 기술만 있으면(방적기의 발명으로 인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거주 이전이 생기고, 전업이 일어났다. 더 이상 가부장적인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자유와 평화라는 슬러건 아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사회제도, 가정의 형태, 부모의 권위 등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경전이었다. 그러나 역사비형학3)의 등장으로 성서를 역사적 산물로 보기 시작했다. 자료설이 등장하고, 공동체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성서가 편집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등장하고 학과가 생겨났다. 4) 역사학의 방법론을 성서에 적용하면서 신약학, 구약학이 분과되었다. 더 이상 이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신앙으로 받아들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나타난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성서를 연구할 때, 누구의 말인지를 논하게 되었고,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논하게 되었다. 신학 전체가 어려워지는 시기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인간은 자신에 차 있었고, 역사의 진보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프레이져(J. Frazer)는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면서 종교는 주술사시대와 과학시대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의 타당성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21C에 이르러 20C에 가장 영향력을 미친 각 분야의 대표 3인을 뽑았는데, 모두 이 시기의 인물이었다. 과학에서는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찰스 다윈이다. 그의 이론으로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창조론을 포기하고 진화론을 가르치게 되었다. 공적 교과서 교육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다윈의 영향은 참으로 엄청났다. 그는 과학의 시대를 열었다.
사회분야에서는 칼 막스였다. 그는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종교라는 상부구조를 장악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인간소외문제를 다룸으로 인간론에 있어서도 유명하다.
심리학에서는 프로이드였다. 그는 희대의 천재였다. 이전까지 막연하게 알던 인간의 내면 세계, 심리, 그 다양한 세계를 아주 뚜렷한 방법론을 세우며 학문적으로 체계화 했다. 기독교가 해석했던 것보다 프로이드는 더 훌륭히 해석했다라고 하기도 한다.
이 위기의 시대에 정통주의 신학에 반발하는 여러 흐름이 있었다. 시대정신의 엄청난 변화에도 정통주의는 침묵만 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이 맹위를 떨쳤다. 슐라이에르마허, 하르낙, 리츨은 자유주의 신학의 거장들이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에서는 이 위기의 시대에 제대로 역사책임적 역할을 하는 내세울만한 신학자가 없었다.
이 시기 정통주의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자유주의가 주도했다. 그리고 신학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 신학은 사회, 과학의 발전과 괘를 같이하고 있었다.
교회는 거듭되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일선의 목사와 신도는 개혁신학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①성서의 권위가 떨어졌다. ②트뢸취를 중심으로 종교다원주의가 들어온다. ③역사적 사고가 팽배하면서 신성이라는 초월적 실체를 이 역사 속에서 견지하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과 부활의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개혁신학은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시기 개혁신학은 완전히 붕괴되었다라고 말한다.
4) 새로운 개혁신학의 시대(1914-1960) : 신정통주의 시대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를 휩쓰는 동안 신앙은 황패해졌고, 교회는 자유주의에 거부반응을 느꼈지만 개혁신학이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했기에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 결정적으로 신도가 줄어든다. 교회는 이중적 펀치를 맞았다. 삶과 신앙의 gap이라는 펀치와 자유주의 신학의 펀치...
교인들의 삶은 빠르게 변해갔다. 그러던 가운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과학의 발달은 무기 개발로 이어졌고, 1차 대전때는 개인 휴대용 화기가 사용되었다. 기독교 이상주의가 전쟁과 살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1차 대전이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리하여 이성에 대한 확신, 역사진보에 대한 확신에 대하여 몇 명의 젊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일부의 각성된 젊은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개혁가들의 정신을 가지고, 신학의 역사책임적 과제를 소중히 여기며 문제를 제기했다. :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책임적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전쟁을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문제제기는 강력했다. 그들은 스승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유명하게 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에드워드 트루나이젠(Eduard Thurneysen, 1888-1974),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2)였다.
이들의 신학을 개혁자들의 정신을 잘 물려받았다하여 신정통주의라 부른다. 변증법적 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그러나 한국교회에는 이것이 다르게 전파되었다. ) 이들을 통해 루터와 칼빈이 20C 다시 살아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들의 신학정신이 새롭게 계승되었다. 이 신학에는 다양한 특징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이 대표적이다. : ①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의 권위회복 ②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확고히 함 ③계시와 종교의 질적 차이를 설명, ④속죄론의 회복, ⑤하나님의 주권 강조
5) 혼돈과 실험의 시대 (1960- )
60년대가 되면서 신정통주의 거장들이 세상을 떠나고 위대한 신학전승을 계승할 사람이 나타나지 았다. 시대가 급변하는 가운데 권위있는 신학은 나타나지 않은 반면, 민중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등 다양한 신학적 실험들이 나타나고, 다원주의 신학, 오순절 신학 등 위험한 신학도 함께 등장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런 가운데서도 양손에 두 과제를 붙들고 종교개혁의 전승을 놓치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