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준혁 2006. 12. 4. 22:21
 

  하나님이 드러나는 사건, 하나님의 진리, 비밀이 드러나는 사건을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비밀과 진리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인간에게 알려 주시는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주체적, 능동적 행위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필요할 때 드러내신다.

  

  - 계시의 전제

  1) 능동적으로 지식을 전해주시는 인격적 하나님이 계신다.

  2) 신적인 계시가 없으면 알 수 없는 사건, 진리, 사실들이 있다.

  3) 계시의 대상이 되는 존재, 이성적 존재가 있다.


  - 계시와 신비Mystery

  하나님의 본질은 신비이다.(사사기에서 마노아가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는다. 나는 비밀이다.)

  알려지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 것을 신비라고 한다.

  하나님은 계시 사건 속에서도 신비로 남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컨트롤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다.

  컨트롤 된다면 가짜 하나님이라든지 인간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고 본다. 참된 신인식이 아니다.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밀리오리)

  첫째, 지속적인 유형을 파악하라.

  성경의 한 부분을 보고 하나님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 안 된다. 각 부분과 전체의 종합을 통해서 전체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개별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으로 보고 또다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 인식을 가져야 한다. 지속적이고 일관됨 속에서 본질을 찾아야한다.

  둘째, 하나님의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라.(지금까지 안 하시던 행동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과거의 사건에 묶이지 않으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43:19-)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존귀와 영광을 위해서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이기적??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행복과도 연결된다.


  둘째는 삶의 변화.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계시와 이성, 신앙(신학에는 계시와 신앙과 이성이 필요하다.)

  계시는 이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죄를 지음으로 이성이 파괴되었다. 이성만 가지고는 좋은 것을 만들 수 없다.

    인간에게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계시는 이성을 파괴하지도 않지만 이성을 대치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성을 변화시킨다.

    롬12: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인간의 이성은 계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계시는 새로운 이성의 도움을 받는다.

  계시는 믿음으로 인식한다.

    믿음이 계시를 인식하고 이성이 해석하고 이해한다.

    칼바르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다.

    칼바르트는 초기에 자연신학을 완전부정하였으나 후에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계시의 종류, 분류

  일반계시, 자연계시

  특별계시, 초자연계시 - 직접계시, 간접계시


    일반계시-보편적인,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계시

    자연계시-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서 하나님이 계시

    (여기서 자연은 自然이 아니다. 신앙고백적인 용어가 아니다.)

    행17:

  1870년에 제1차 바티칸공회를 하는데 1962-5년 사이에 제2차바티칸공회를 함.

  

    특별계시

    초자연계시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오신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이것도 무효가 된다.


    특별계시가 두 가지로 나눠 지는데... 직접, 간접..

      직접계시-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들었던 성경기자들의 계시가 직접계시다.

      간접계시-성경을 통해서 읽는 사람들이 듣는 사람들이 받는 계시


  판넨베르크가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을 이야기 한다.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다.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사건이다.

  

  칼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일반계시를 믿어야 하는 이유(?)

  선교적인 차원에서 일반적인 계시를 인정해야 한다.

    신자와 불신자가 만남으로 선교

    자연계시가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빛이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해서 일반계시가 필요하다.

    일반계시가 기독교의 보편성을 만든다. 종교의 세계에서 학문의 세계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일반계시만 주장하면...

  특별계시의 중요성이 약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원계시(일반계시)는 구원의 열망이 표현되기는 하지만 심판의 계시가 나타난다.

  

일반계시에 대해서 칼빈은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종교의 씨앗, 하나님에 대한 감각

일반계시는 올바른 종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죄가 일반계시를 컨트롤(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계시는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한다.


=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

칼빈-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의 약시를 인도하는 등불이다. 안경이다. 똑똑히 보게 한다.(일반계시만으로는 올바른 길을 갈 수 없다.)

      자연신학은 그 자체로 구원의 신학이 아니다.

      특별계시에 근거해야 올바른 자연신학, 자연계시가 가능하다.


계시의 점진성

  계시가 마감되었는가? 지금도 일어나는가?

  제한적으로 긍정해야 한다.

  특별계시에 있어서 직접계시와 간접계시가 있는데 직접계시는 종결되었다.

  쿨만Cullmann-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이 죽음으로 특별계시는 마감되었다. 그러나 간접계시는 계속된다.

  칼바르트- 하나님의 말씀(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에서 선포된 말씀은 계속 된다.

  판넨베르크- 점진적이다. 점점 계시가 일어나고 있다. 직접계시는 종결되었지만 간접계시는 점진적이다.


■ 역사로서의 계시 개념

  W.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역사로서의 계시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역사적 사건은 특정한 행동, 이스라엘이나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들만 계시의 역사가 아니고 보편적 역사가 하나님 계시의 역사가 될 수 있다.

  - 하나님은 특정한 역사의 주님이 아니라 보편적 역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보편적 역사를 통해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계시의 방법은 간접계시다. 역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내신다.

  역사를 통해 단번에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나타내신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서서히 점진적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계시의 완전은 역사의 종말에 가서 드러난다.

  성경은 역사로서의 계시에 대한 예언이고 보도(전달)이고 해석이다.(성경 자체가 아닌 역사적 사건이 계시)

  예수그리스도 사건은 특별한 사건으로 본다. 예수그리스도 사건은 종말적 사건이다. 역사의 종말에서 일어날 사건이 앞당겨 도중에 일어났다. 예수의 역사는 역사의 도중에 일어났지만 본질은 종말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계시 사건이다.


-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이 판넨베르크의 보편적 역사사건으로 본다. 한국민중의 역사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구원과 해방, 민중을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의미를 가진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동학혁명, 31운동 같은 민중해방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셨다.

(고 서남동목사의 논문 “두 이야기의 합류”를 보면 우리나라 민중의 이야기와 성경이야기가 합해지는 것으로 본다.)


■ 자연신학

  자연계시를 통한 신학. 자연적인 계시, 일반적인 계시.

  이 부분에 대한 대표적 논쟁이 에밀 브룬너와 칼 바르트 사이에 있었다.

  칼바르트의 경우는 자연신학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에밀브룬너는 가능하다고 했다.


  에밀브룬너 “자연과 은총” (Natur und Gnade) 1936년.

  -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나타내신다. 자연신학이 가능하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가능하다.

  칼 바르트 “아니오”(Nein!)

  - 에밀브룬너의 주장이 잘 못되었다.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은혜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자연적으로 인간이 그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자연적인 신의 계시에 대한 능력(접촉점, Contact point)이 인간에게 있는가?

  이 논쟁은 접촉점 논쟁이라 할 수 있다.

  브룬너는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바르트는 없다고 주장했다.

  브룬너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이 주어져 있다고 한다. Imago Dei

  하지만 바르트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고 본다. 그러니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

  브룬너는 그 형상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다. 브룬너는 실질적 형상과 형식적 형상으로 나눈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실질적 형상은 파괴되었지만 형식적 형상은 남아있다.

  형식적 형상이란 것은 인간성을 가리킨다. 인간이라는 것. 그래도 인간이잖아..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희미하게나마 자연신학이 가능하다.

  바르트는 브룬너의 접촉점에 대해 비판을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자연인에게는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은혜의 신학, 은총의 신학만 있다.

  20년 후에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간성과 교회교의학 3권에서 자연신학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미루어 추측컨대 자연신학에 대해 브룬너가 판정승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나..


  일반적으로 자연신학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자연신학이 구원의 신학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신학은 될 수 있어도 구원신학은 될 수 없다. 제대로 된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